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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격자, 밀도 그리고 여백
초등학생 시절, 내게 가장 자극적이고 밀회 같던 공간은 익산 역전의 낡은 상가 건물에 있던 롤러스케이트장이었다. 퀴퀴한 냄새와 번쩍이는 조명 아래, 불량해 보이는 중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 어울려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그곳은 단숨에 어린 나의 ‘길티 플레저’를 자극했다. 그 낡은 건물 밖으로 나오면, 역전 7층 건물(당시 이리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에 있는 경양식집에서 돈가스를 써는 어른들의 고급스러운 풍경이 펼쳐졌고, 시장엔 언제나 농산물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린 눈에 비친 도심은 사람의 체온으로 늘 눅눅하고 활기찼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익산(구 이리)은 드라마틱한 근대 건축물이 줄지어 서 있거나 한눈에 감탄을 자아내는 명소가 수두룩한 도시가 아니다. 1912년, 호남평야의 막대한 쌀을 군산항으로 수탈해 가기 위한 중간 기지로 일제가 조성한 신도시였다. 바둑판처럼 나뉜 길 위엔 일본식 지명이 붙었고, 오로지 효율적인 수송을 위해 철길을 따라 상권이 형성됐다. 1977년엔 이리역 폭발 사고로 도심 전체의 유리창이 깨져 나가 가족들이 굴다리 밑으로 피난 가야 할 만큼 대대적인 파괴를 겪기도 했다.
내 고향은 그렇게 서글픈 내력과 재난의 역사 위에 다시 지어진,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지방 소도시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외곽 택지 개발은 원 도심의 혈맥을 손쉽게 끊어 놓았다. 지방 소도시의 시장 파이는 너무 작고 한정적이다. 인구가 계속 유입되는 대도시의 외곽 개발은 건강한 확장일 수 있지만, 인구가 정체된 지방의 외곽 개발은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기형적인 제로섬 게임일 뿐이다.
구 도심의 원주민과 이해관계를 설득하는 고단한 과정을 피하려고, 지자체와 개발업자들은 손쉬운 외곽 논밭을 개간해 아파트를 찍어냈다. 영등동에 CGV와 대형 마트가 들어서자, 오랜 상권이었던 중앙동은 거짓말처럼 피가 빠져나갔다. 상가는 빈집처럼 텅 비었고,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빽빽하던 거리는 순식간에 버려진 섬처럼 쓸쓸해졌다. 아이러니한 건 그 다음이다. 자본과 행정이 멀쩡한 원 도심을 버리고 외곽을 개발해 원 도심의 피를 다 빼놓더니 2000년대 들어 원 도심이 낙후됐다며 ‘도시재생 뉴딜’이라는 사업을 들고 찾아왔다.
정작 상권을 이용할 사람(수요)은 이미 외곽으로 빠져나갔는데, 텅 빈 거리에 돈을 들여 최신식 건물을 세우고 시끌벅적한 이벤트를 벌였다.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정작 그 도시의 진짜 삶과 겉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씁쓸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건축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도시와 공간을 관찰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어린 시절에 무심코 걸었던 익산 원 도심의 진정한 가치를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개발되지 못했기에 그대로 남아 있는 가로의 폭과 밀도였다.
2011
2026
일제강점기에 바둑판처럼 그어진 격자형 도로망, 그 길을 따라 서 있는 2~3층 높이의 나지막한 건물들. 지나치게 넓지 않은 2~4차선의 도로 폭과 낮은 건물이 만들어내는 비례감은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이상할 만큼 깊은 평온함과 소속감을 선사한다. 밀도가 과하지 않기에 도시가 사람을 옥죄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이사이 여백을 만든다. 지방 도시의 이 나지막한 밀도야말로 우리가 보존하고 공유해야 할 미덕이자 공동의 기억 구조였던 것이다. 도시에 재난이 찾아오거나 쇠락이 밀려올 때, 우리 사회는 늘 힘없고 낡은 것부터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리곤 했다. 이리역 폭발 사고 직후,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깨끗하게 새로 지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가장 먼저 밀려나간 옛 직장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우기는 쉽다. 하지만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은 분명히 다르다. 단지 세월이 묻어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운 얼룩 취급을 하며 지워버리고, 그 위에 번쩍이는 신축 아파트나 정체불명의 대형 매장을 찍어내는 방식은 그 안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서사와 시간의 켜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폭력과 다름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도시의 활력은 과연 무엇일까?
자본이 몰려들어 가게들이 쫓겨나고 화려한 인스턴트식 ‘핫플’이 번쩍거리는 ‘뜨는 동네’ 같은 게 아니다. 그 길을 수십 년간 지켜온 오래된 세탁소와 미용실, 작고 정겨운 가게들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 그 공간을 이용해 온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계속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인구 30만 명도 되지 않고, 차를 타면 15분 만에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를 수 있는 작은 도시에서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자꾸 밀어버리고 밀도 높게 무언가를 채워 넣는 거창한 재개발이 아니다. 빈 땅에 자그마한 정원을 만들고 시민들이 숨 쉴 수 있는 공원과 여백을 더하는 편이 도시 생명을 이어 나가는 데 훨씬 숭고하고 의미 있다.
초등학생 시절 나를 설레게 했던 낡은 상가 건물의 롤러스케이트장은 주변 건물과 다르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상은 놀랍도록 빠르게 변하고 외곽에는 정체 모를 신도시가 들어섰지만, 낡은 채로 멈춰 서 있는 원 도심의 건물은 나에게 여전히 이야기를 건넨다. 지방 도시의 정체된 풍경은 지워야 할 얼룩이 아니라 오랫동안 읽어내야 할 다정한 텍스트다. 건축과 도시 또한 사람들의 기억이 쌓여갈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서 주는 여백이어야 한다. 이 도시의 나지막한 밀도와 정겨운 가로의 비례가 훼손되지 않기를, 도시를 바라보고 가꾸는 우리의 태도가 깊어지고 다정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임진영 대표
건축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오픈 하우스서울 대표. 도시와 건축을 기록하고 소개해 왔으며, 2014년부터 오픈 하우스서울을 통해 건축과 장소에 축적된 역사와 이야기를 시민과 나누고 있다.
경계를 허무는 나의 사이 공간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내 공간적 감각의 뿌리는 여전히 전주 교동 한옥마을의 낮은 골목길에 닿아 있다. 1979년생인 내가 보낸 유년 시절의 한옥마을은 지금처럼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돈돼 상업적 한옥이 빼곡하게 들어선 관광지는 아니었다. 집집마다 지어진 시기도, 사는 사람도 달라 처마 높이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오래된 흙담 모양이나 재료도 제각각이었던 자연발생적 동네였다. 오래된 담장에는 비를 맞으며 생긴 시간의 흔적이 자작하게 남아 있었고, 모퉁이마다 이웃들이 내놓은 화분이나 세월을 견딘 나무의 깊은 색조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은 고즈넉한 정취가 남은 개량 한옥이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길게 내려온 처마가 마당 한쪽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고, 여름이면 마루나 툇마루에 누워 온종일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집 안과 바깥, 마당과 골목을 가르는 경계는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하지 않았다. 친구가 찾아오면 굳이 집 안으로 들어올 필요도 없이 툇마루에 툭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었고, 지나가던 이웃 역시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과 밖이 자연스럽게 완충되는 그 ‘애매한 사이 공간’에서 우리는 늘 어우러져 놀았고, 서로의 일상과 온기를 끊임없이 교류했다.
2014
돌이켜보면 동네 전체가 거대한 놀이터였다. 동네 친구들과 자주 오르던 오목대는 한옥마을의 겹겹이 이어진 기와지붕과 골목길, 멀리 이어지는 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동네에서 가장 높고 조망이 시원한 출발점이었다. 오목대 아래, 완행열차가 지나던 한벽굴(한벽당 아래 터널)과 그 아래를 흐르던 전주천은 어린 나에게 유난히 아득하고 신비로운 탐험지였다. 승암산에서 오목대로 이어지던 산줄기를 잘라 철길을 낸 그곳. 사람들은 지금의 한벽굴을 역사적 장소나 한벽당의 정치로 기억하겠지만, 어릴 적 우리에겐 단지 동네와 동네를 연결하며 삶을 넘나들게 해주는 길목이었다. 기차가 지나가지 않을 때를 노려 레일을 조심스레 밟으며 터널을 건너면, 늘 보던 동네 풍경이 신기하게도 조금씩 달라져 있곤 했다.
터널을 지나 내려가면 정비되지 않은 야생의 전주천이 넓게 펼쳐졌다. 여름이면 옷을 홀딱 벗어던진 채 돌더미와 개천 사이에서 멱을 감고 고기를 잡으며 해가 질 때까지 뛰어놀았다. 젖은 발로 어머니가 사준 슬리퍼를 끌며 골목으로 돌아오던 길,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흙담에 물이 자작하게 스며들며 구수하고 알싸한 흙냄새가 온 동네를 채웠다. 맑을 때와 비가 왔을 때 전혀 다르게 번지던 구수한 흙냄새, 집집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와 냄새가 섞여 들던 어둑한 저녁 골목의 온도와 공기는 지금도 온전히 피부에 남아 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터널을 건너고 전주천과 골목길을 따라 뛰어놀며 도시와 공간의 생김새를 온몸으로 익혔다. 길의 어디에 여백이 생기고, 비가 오면 물길이 어디로 흐르는지, 땅의 기단과 시선이 어디서 열리는지, 사람의 눈높이와 주변 풍경이 어떻게 편안한 위계를 맺는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다.
2026
건축가가 된 지금, 어릴 적에 오르내리던 오목대 아래 한옥들의 낮은 비례와 처마를 깊이 있게 읽어낸다. 현대의 수많은 건축물이 안과 밖을 차갑고 단편적인 벽이나 창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단면을 지녔다면 한옥의 처마와 툇마루, 대청은 자연과 인간이 편안하게 만나는 완충 장치이자 슬기로운 ‘사이 공간’이다. 햇볕과 비를 단번에 차단하거나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대신, 필요한 만큼 한 번 걸러서 받아들이는 슬기로운 경계선. 위압적으로 솟아오르는 대신 땅에 낮게 깔려 수평의 시선을 만들어주는 긴 지붕선처럼 말이다.
제주 ‘유지커피웍스’ 같은 설계 작업에서 늘 중정과 깊은 틈, 자연 소재, 낮게 드리운 처마, 그리고 내부와 외부 사이에 깊은 켜와 ‘시퀀스’를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유년의 공간들이 내 삶의 DNA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건축물 자체가 과도한 존재감으로 주변 환경을 압도하지 않고, 자연물(팽나무, 돌담, 경사 지형 등)과 조용히 응답하도록 매스를 분절하고 사이 틈을 내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감각은 어린 시절 대청마루에서 체득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다시 찾은 한옥마을은 한결 깨끗해지고 매끄럽게 정돈돼 있었다. 도시는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하고 쓰임도 달라지며 정제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형태나 표면은 정제될지언정, 집집마다 조금씩 어긋나며 우연히 만들어내던 유쾌한 레이어와 사람들의 생활 냄새, 이웃이 스스럼없이 만나던 물리적· 정서적 여백이 희미해진 건 아쉽다. 건축가가 도면으로 읽어낼 수 없는 도시의 진정한 가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과 손때가 닿아 쌓인 시간의 집적(集積)과 삶의 방식에 있으니 말이다.
건축은 완성된 외형이나 화려한 재료를 과시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그곳에서 편안하게 머물며 시간을 품어주는 일이다. 나에게 좋은 공간이란 그 안에 머물렀을 때 이유 없는 평온함이 느껴져 오래도록 머물고 싶고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고 싶어지는 장소다. 비 오는 날 잠시 피했던 한벽굴 터널의 서늘함, 툇마루 아래로 시간이 흐를수록 형태로서의 건축은 조용히 뒤로 물러서고, 그 빈자리에 사람들의 따뜻한 일상과 기억이 더 빽빽하고 풍성하게 채워지기를 꿈꾼다.
이성범 건축사
전주 한옥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건축사.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현재는 독립적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제주도 ‘유지커피웍스’ 등이 대표작이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1983년에 문을 연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2022년 12월 31일,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뒤로하고 영업을 마쳤다. 남산 자락에 오랫동안 자리해 온 건물이었기에 그 소식은 단순히 호텔 하나가 문을 닫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힐튼이 처음 문을 연 1983년의 서울은 지금과는 꽤 다른 얼굴이었다. 지금처럼 높은 건물이 흔하지 않았고, 남산을 등지고 우뚝 선 호텔은 그 자체로 새로운 서울의 풍경이었다.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건물은 남산의 곡선을 따라가듯 완만하게 꺾여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여러 층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커다란 아트리움이 펼쳐졌다. 높은 천장 아래로 빛이 떨어지고, 대리석과 황동으로 이뤄진 계단과 기둥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공간에는 1980년대 서울이 상상했던 ‘근사한 미래’의 모습 같은 게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오래된 장소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곳에 다시 가는 것만으로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까지 함께 소환된다. 어릴 때는 한없이 크고 화려하게 느껴졌던 로비가 어른이 돼 다시 찾으면 조금 다르게 보이고,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계단이나 복도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같은 자리에 있는데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만 변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영업 종료를 한 달 앞둔 때부터 문을 닫은 뒤 한 달까지, 나는 틈틈이 힐튼을 찾아가 그 변화를 기록했다. 마지막을 앞둔 호텔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불이 켜져 있었지만, 곧 이 풍경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진 속에서만 다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됐다. 도시는 늘 새로운 이름과 기능을 요구하지만, 때로는 사라진 자리에 더 많은 이야기가 남는다.
최용준 사진가
지도와 디지털 로드 뷰를 활용해 촬영 장소를 탐색하고, 직접 도시를 걸으며 익숙한 풍경 속에서 숨겨진 장소와 건축의 단면을 발견해 온 건축 사진가. 오래된 건물의 표면, 도시의 우연한 구조, 이름 없는 생활 공간처럼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풍경을 새롭게 바라본다.
콘크리트 녹색섬
나는 개포주공아파트에서 자랐다. 오늘날 아파트가 가진 완결성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동과 동 사이는 지상 주차장 덕분에 여백이 있었고, 그 여백을 빼곡하게 채운 건 깊게 뿌리내린 나무들이었다. 지형의 굴곡을 다듬지 않고 들어선 아파트 단지 곳곳에는 작고 낮은 언덕이 솟아 있었고, 덤불은 아이들에게 다정한 그늘이 돼주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풍경이 특별한 서사라는 걸 알지 못했다. 나무는 그저 나무였다.
개포주공은 오래전부터 예고된 부재를 안고 있는 동네였다. 1990년대 말부터 이곳이 철거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진정한 소멸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그 동네의 혈관 같은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고, 렌즈에 개포주공아파트의 풍경을 담아 세상에 공유했다. 사진 속에는 명확한 동 번호도,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없지만, 그곳에서 유년을 보낸 이들은 귀신같이 그 장소를 짚어냈다. 심지어 나무 한 그루의 기울기만 보고도 장소를 알아차렸다.
어쩌면 우리는 장소를 주소라는 기호로 기억하지 않는 게 아닐까? 어떤 길의 미세한 경사, 나무가 드리우던 그늘의 위치, 계절에 따라 빛이 부서지던 각도 같은 온감으로 장소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그리움의 지형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다시 동네를 걸었다.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아카이브를 물었다. 이미 오래전 타향으로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먼 해외에 터를 잡은 이들도 있었다. 산책의 끝에 자그마한 제안을 건넸다. “오늘 스쳐 간 나무 중에서 당신의 기억을 건드린 한 그루에게 이름을 붙여주세요.”
2010
‘엄마 냄새 나무’ ‘어릴 적 내 친구 병아리와 햄스터가 묻힌 나무’…. 사람들은 오랫동안 닫아둔 마음의 궤짝을 열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너무 작고 무용해서 평소라면 결코 세상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기억이었다. 며칠 후, 민들레의 구조와 개구리의 겨울눈 같은 것이 기록돼 있는 노트를 발견했다. 중학생 때 썼던 노트였다. 그 시절의 내가 작은 생명을 그토록 다정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었던 한 사람의 흔적이 떠올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13평 남짓이었고, 작은 방에는 한동안 할머니 한 분이 세 들어 사셨다. 부모님은 생업으로 바빴고, 덕분에 나는 해가 기울 때까지 밖에서 놀다가 어둑해져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늘 할머니의 정적을 깨뜨리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내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할머니의 방문은 언제나 한 뼘 열려 있었다. 그 어둠속의 작은 문틈이 어린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안식처였는지, 늘 문틈으로 기웃거리다 슬며시 그 작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 다리를 베고 누워 함께 TV를 보았다. 어둠속에서 푸르스름하게 일렁이는 TV 화면의 음영에 의지해 할머니는 밤새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했다. 할머니의 얼굴, TV 속 장면, 우리 사이에 오갔던 대화, 모든 게 희미한 기억이지만,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까무룩 잠들어버렸던 온기만큼은 또렷하다.
2026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 삶을 통과하느라 수많은 기억의 조각을 길 위에 분실하며 살아간다. 내가 열광했던 것, 아파했던 것, 온전히 느꼈던 것조차 잊어버린다. 그러나 오래된 장소의 땅을 다시 밟으면, 신기하게도 그 분실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사람들이 소멸을 앞둔 동네로 자꾸만 돌아오는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이런 사소하고 다정한 기억은 어떤 정교한 지도에도, 화려한 재건축의 조감도에도 새겨지지 않는다. 고향이란 물리적으로 다시 돌아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내가 까맣게 잊고 살던 유년의 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가 아닐까? 그 장소마저 마침내 콘크리트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한때 그 공간의 밀도 속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는 건, 결국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 몫인 것 같다.
이성민 영화감독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사라지는 나무들을 7년에 걸쳐 기록한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녹색섬>의 감독. 개포주공아파트의 변화와 그 안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생명의 흔적을 집요하게 좇았다. 그것도 사진과 영상, 취재, 다양한 형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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