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도 살짝 보고 가실래요?
별자리 운세로 알아보는 8월 넷째 주는?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부이요네 (Bouillonne´)’ 기법으로 장식한 실크 시폰 롱 드레스.
시폰 베이스 위로 기하학적 인타르시아를 수놓은 비대칭 드레스.
오트 쿠튀르는 쉽게 닿을 수 없는 ‘비현실의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자신의 첫 펜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위해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대지로 향했다. 그것도 파리가 아닌 펜디의 출발점이자 자신의 고향인 로마로. 펜디가 이번 프로젝트의 무대로 로마국립근현대미술관을 낙점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쇼와 더불어 이곳에선 1985년, 칼 라거펠트와 펜디가 함께 선보인 전시를 40년 만에 복원한 <작업 여정 그 이후, 펜디/칼 라거펠트 1985(After un Percorso di Lavoro. Fendi/Karl Lagerfeld 1985)>가 공개됐다.
첫 쿠튀르 컬렉션을 발표하는 시점에 굳이 그를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이 질문에 ‘몸’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답을 내놓았다. 이번 컬렉션을 관통한 키워드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 욕망은 그간 패션이 말해 온 과장된 관능이나 노골적인 유혹과는 결이 다르다. 신체를 조이거나 변형시키는 대신, 몸이 원래 움직이고 싶은 방향을 따라가는 옷. 이것이 그가 정의한 욕망이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과 역사, 자유를 오랫동안 탐구해 온 그는 펜디에서 그 시선을 한층 더 개인적인 차원으로 가져왔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몸은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한없이 자유롭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선택 로마국립근현대미술관.
쇼의 핵심은 절제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놀랄 만큼 힘을 뺀 실루엣. 벨벳 코트와 기모노 형태의 오버코트는 어깨를 과장하지 않았고, 허리를 억지로 조이지 않았다. 분명 기술은 탁월했지만 요란하게 소리치지 않는다. 좋은 재단이 늘 그렇듯, 완성도는 침묵 속에서 증명됐다. 가벼운 시폰 위를 흐르는 흑백 스트라이프는 움직일 때마다 형태를 바꾸며 몸과 함께 호흡했다. 코르셋 없이 만들어낸 곡선은 최근 몇 시즌 쿠튀르에서 반복된 ‘해방된 몸’이라는 화두를 다시 꺼내면서도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냈다.
정교한 장식도 전면에 나서기보다 옷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벨벳과 그랑 드 푸드르, 더블 캐시미어, 튤, 시폰처럼 성격이 뚜렷한 소재를 한 룩 안에 배치하면서도 시선은 언제나 실루엣으로 향했다. 벨트는 몸을 교정하는 장치가 아닌, 옷을 여미는 최소한의 기능으로 남았다. 어깨는 부풀리지 않았고, 허리는 과장하지 않았으며, 스커트는 과도한 볼륨 대신 드레이프의 흐름으로 형태를 만들었다. 이는 전통 쿠튀르가 코르셋과 내부 구조를 통해 이상적인 비례를 구축해 온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몸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몸을 아름답게 따라가는 패턴을 고민했다.
컬렉션 중반부를 장식한 튤 케이프와 망토도 또 다른 백미였다. 투명한 튤은 단순히 가벼움을 위한 소재가 아니었다. 케이프의 구조를 세우는 뼈대가 됐고, 그 위를 수놓은 아라베스크 모티프는 자수와 가죽 인레이, 퍼 세공이 겹겹이 쌓이며 부조 같은 깊이를 만들었다. 특히 흑백 스트라이프를 활용한 시폰 드레스는 이번 컬렉션의 미학을 응축한 룩 가운데 하나였다. 규칙적인 선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흐트러지고 다시 정렬됐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말한 ‘몸을 따라 움직이는 옷’이라는 개념이 가장 설득력 있게 구현된 순간이었다.
블랙 튤 위에 가죽 플라워 자수와 레이스 인레이를 더한 튜닉 드레스.
‘미로 (Labyrinth)’ 가죽 인서트로 장식한 캐시미어 코트.
프린지와 자수로 장식한 파치먼트 컬러 조젯 베스트.
블랙 조젯과 실크 튤 베이스에 실크 튤 인레이를 더한 드레스.
무엇보다 치우리는 첫 장부터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펜디라는 하우스가 오래도록 축적해 온 기술과 기억 위에 자신의 언어를 조용히 포갰다. 이번 시즌의 중심에는 ‘협업하는 아틀리에’라는 개념이 자리했다. 하나의 디자인을 위해 재단사와 퍼 장인, 자수 장인, 패턴 메이커가 서로의 기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 자체를 창작 언어로 바라본 것이다.
로마의 가족 경영 하우스로 출발한 펜디는 오랫동안 퍼 아틀리에를 중심축으로 삼아왔다. 당시 권위적인 외투로 인식되던 퍼를 전혀 다른 소재처럼 다루기 시작한 펜디는 이후 수십 년 동안 퍼를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하우스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칼 라거펠트가 소재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면, 치우리는 그 결과를 몸의 움직임으로 다시 번역하는 데 집중했다. 멀리서 보면 깃털처럼 가볍고,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퍼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물성을 극단적으로 얇게 다듬은 것. 퍼는 아라베스크 자수 사이로 흩날리며 섬세한 결을 만드는가 하면, 꽃잎을 이루는 작은 조각으로 분해됐다. 이토록 절제된 접근은 오히려 펜디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2015년 공식적으로 쿠튀르 라인을 출범한 이후 펜디는 칼 라거펠트,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 그리고 킴 존스를 거치며 퍼와 자수, 인레이, 소재 개발이라는 문법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감추고, 구조보다 움직임을 앞세웠다. 그렇다고 이번 컬렉션이 미니멀리즘으로 회귀한 건 아니다. 오히려 절제를 통해 쿠튀르의 밀도를 높인 쪽에 가깝다. 불필요한 장식은 줄였지만, 소재와 기술은 어느 때보다 풍부했다.
쇼장을 빛낸 제시카 알바와 사라 제시카 파커.
1985년, 로마국립근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실제 전시 전경.
쇼가 끝난 뒤에도 런웨이 밖으로는 여전히 펜디의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40년 만에 돌아온 전시는 언뜻 컬렉션에 곁들여진 기념 전시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번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텍스트였다. 1985년, 로마국립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패션 하우스를 미술관이라는 제도권 예술 공간으로 들여와 창작 과정을 전시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패션 전시가 완성된 의상을 진열하는 데 머물렀다면, 칼 라거펠트와 큐레이터 이다 파니첼리는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스케치와 종이 패턴, 샘플 보드, 캔버스, 퍼 샘플, 프로토타입을 하나의 창작 생태계처럼 배치했고, 관람자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따라 이동하도록 설계됐다. 지금은 익숙한 전시 문법이지만, 당시에는 급진적 시도였다. 주인공은 완성된 코트나 드레스가 아닌 아틀리에였던 셈.
이번 전시에서 일부 공간은 원본 도면과 아카이브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됐고, 현존하지 않는 오브제는 기록을 바탕으로 새롭게 복원됐다. 물론 1985년의 경험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전시를 다시 만든다는 행위는 언제나 현재의 시선이 개입되는 번역 작업이다. 그래서 제목 앞에 붙은 ‘After’는 단순한 부제가 아닌,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을 설명하는 단어다. 전시는 샘플 보드와 칼레이도스코프, 디자인 프레임워크, 시어터, 콤, 비디오, 스케치, 컴퓨터 등 여덟 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칼 라거펠트가 펜디와 협업한 스케치 중 일부.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80여 점의 스케치와 수십 점의 샘플 보드였다. 수정 흔적으로 가득한 드로잉이 완성된 의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 하나를 지우고 다시 그린 자국, 소재를 바꿔 붙인 메모, 여러 번 덧칠한 컬러 테스트는 하우스의 완벽함이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증명한다. 1977년 제작된 패션영화 <Histoire d'eau>도 다시 등장했다. 칼 라거펠트가 자신의 첫 펜디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을 위해 의뢰한 이 영화는 이번 쿠튀르 컬렉션에서 중요한 레퍼런스였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을 재현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름의 로마를 유영하는 젊은 여성의 자유로운 태도와 공기를 컬렉션의 리듬으로 옮겨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컬렉션과 전시는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진다. 런웨이는 몸이 움직이는 방식을, 전시는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과정이다. 그러나 둘의 중심에는 아틀리에가 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첫 시즌부터 펜디의 미래를 자신의 스타일로 정의하기보다 하우스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제작 문화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펜디의 소재 연구를 보여주는 샘플 보드 섹션.
이것이 이번 프로젝트가 과거를 돌아보면서도 결코 회고전에 머물지 않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미래의 동화 A Fairytale of the Future> 전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칼 라거펠트와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 킴 존스가 지난 10년간 완성한 쿠튀르 피스를 한자리에 모은 이 전시는 연대순으로 역사를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시대의 의상을 병치해 하나의 기술이 어떻게 다른 디자이너의 언어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준다. 퍼의 물성을 탐구하는 방식, 인레이와 자수의 조합, 패턴을 세우는 사고방식은 디자이너가 바뀌어도 하나의 계보를 이룬다. 펜디에서 헤리티지란 고정된 스타일이 아닌, 아틀리에가 축적한 방법론에 가깝다.
쿠튀르는 장인의 세계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늘 완성된 옷 뒤로 숨곤 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런웨이에서는 손의 흔적이 드러나는 옷을, 전시에서는 손이 지나온 시간을 그대로 펼쳐 보였다. 미래는 새로운 아이디어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오래된 기술을 찬찬히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다음 시대는 조용히 출발한다. 로마라는 불멸의 도시를 배경으로 쇼와 전시가 나란히 놓인 펜디의 풍경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펜디는 무엇을 남겼고, 앞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용을 입력해주세요.
삭제하시겠습니까?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엘르와 만난 스타들의 더 많은 이야기.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한 서비스 입니다.
댓글쓰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