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신세계X프리즈, 폴 콕스의 다이어리를 펼치다

‘2026 프리즈 서울’ 신세계 라운지에서 마주한 느린 회화의 시간.

프로필 by 이경진 2026.09.21



아트페어에서는 동시대 미술의 수많은 장면이 빠르게 교차합니다. 매년 9월에 열리는 ‘프리즈 서울’ 역시 마찬가지죠. 올해로 5회를 맞은 '2026 프리즈 서울'에는 30개국·지역에서 130여 개 갤러리가 참여했습니다. 그 자체로 거대한 시각적 사건이었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뜻밖의 속도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코엑스 C홀과 D홀을 잇는 곳에 자리한 신세계 라운지. 올해 프리즈 서울의 헤드라인 파트너로 처음 참여한 신세계그룹이 선보인 이 공간에서는 프랑스 작가 폴 콕스의 전시 <L’Immensité du Quotidien: The Monumental Everyday>가 열렸어요. 작가의 ‘Diary’ 연작 336점을 한자리에 모아 처음 공개한 자리입니다.


하루의 끝에서 시작된 그림

선명한 색채와 자유로운 붓질이 어우러진 벽면을 따라 수백 점의 작은 그림이 펼쳐졌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한 장의 회화가 보였고, 몇 걸음 물러서면 서로 다른 그림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이 됐습니다. 관람객은 작품 앞을 빠르게 지나치는 대신, 느린 걸음으로 어느 한 점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전체를 바라보기를 반복했죠.


폴 콕스는 파리와 부르고뉴를 오가며 활동해 온 작가입니다. 회화를 중심으로 발레와 오페라의 무대 및 의상 디자인, 연극 포스터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작업해 왔어요. 그의 회화에는 주변의 풍경을 관찰하는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그의 ‘Diary’ 연작 역시 부르고뉴의 풍경에서 시작합니다.


“저녁 무렵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부르고뉴는 매우 아름답고 고독한 곳이거든요. 저는 이걸 ‘데이-페인팅(Day-Painting)’이라 불렀어요.” 폴 콕스는 저녁 산책을 하며 마주한 장면, 하루의 끝에 달라진 빛의 색,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의 기분을 매일 같은 크기(21 x 29.7cm)의 종이 위에 기록했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날을 골라 그리지 않았어요. 평범하게 흘러간 하루 역시 한 장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336개의 일상이 하나가 될 때

전시의 제목인 'L’Immensité du Quotidien(일상의 무한함)'이 의미하는 것처럼, 전시는 사적인 습관과 매일의 관찰이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회화적 경험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줍니다. 폴 콕스는 같은 규격의 종이에 구아슈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 안에 구현된 색과 형태, 붓질은 매번 달랐습니다.


어떤 그림에서는 색채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어떤 그림에서는 여백이 도드라집니다. 폴 콕스가 풍경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는 하루의 어느 한 순간을, 그에 담긴 빛과 색, 시간의 분위기, 감정과 느낌을 포착하며 'Diary' 연작을 이어갔습니다.


익숙한 풍경을 매일 다시 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은 더 이상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죠. 콕스는 같은 형식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그 익숙함에서 벗어납니다. 어제와 다른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것을 다시 보기 위해서예요. 콕스는 어린 시절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회화에서 색과 형태만큼이나 간격과 반복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여기에서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336점의 그림을 하나의 풍경으로 읽는 순간, 이 연작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섭니다. 모두의 하루하루는 서로 다르고 때로는 특별할 것 없는 순간이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한 사람의 역사이자 기록이 되는 법이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도 자세히 바라보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Diary’를 바라보는 일은 결국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일과 닮았습니다.


일상 가까이 예술을 들이는 방식

이번 전시는 신세계그룹과 프리즈 서울이 2030년까지 이어갈 5년간의 파트너십을 기념하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 유통기업이 세계적인 아트페어의 헤드라인 파트너가 되고, 그 시작을 한 작가의 일기 같은 회화로 채웠다는 사실은 흥미로워요. 예술을 일상 가까이 가져오겠다는 기업의 뜻이 실제 공간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신세계그룹이 프리즈 서울과 5년간의 파트너십을 시작하며 내세운 방향은 ‘고객이 머물고 싶은 일상 속 문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2026 프리즈 서울'에 마련됐던 신세계 라운지는 그 구상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죠. 신세계그룹은 1963년 문을 연 신세계갤러리를 비롯해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트리니티 가든, 스타필드의 별마당 도서관,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열린아트공모전, 조선호텔앤리조트의 아트 투어까지, 예술을 일상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접점을 꾸준히 확장해왔습니다. 프리즈와의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신세계그룹은 국내외 작가와 갤러리, 컬렉터, 문화예술 기관이 한국에서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힘을 보탠다는 계획입니다.


예술을 일상 가까이 가져온다는 말은 때로 너무 익숙하게 들리지만, <L’Immensité du Quotidien: The Monumental Everyday>는 그 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매일 지나치는 풍경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 어제와 달라진 빛을 알아차리는 일, 하루의 끝에 잠시 멈추는 일도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작품이 오가는 프리즈 서울에서 폴 콕스의 전시는 크고 빠른 세계를 잠시 멈춰 세웠습니다. 매일의 시간은 충분히 많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들려주면서 말이죠.


Credit

  •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