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은으로 3000개의 민들레 홀씨를 만든 금속공예가

제주에서 자란 고혜정 작가에게 자연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체득된 감각이다. 고혜정이 은이라는 재료를 만나 탄생시킨 형태들에 관한 이야기.

프로필 by 이경진 2026.07.17

작업이 이어지는 보통의 흐름과 과정은

늘 계획된 아이디어보다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 물과 돌 사이의 유유한 흐름처럼 자연 속의 작고 소소한 장면들이 어느 순간 내 안에 형태로 남고, 그렇게 축적된 감각들이 오랜 시간 머물며 조금씩 구체화된다. 재료를 선택하는 과정도 형태와 분리돼 있지 않고 금속이라는 단단한 물성이 어떻게 하면 가장 유연하고 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어느 정도 이미지가 선명해지면 간단한 드로잉이나 모형 작업을 거쳐 본작업에 들어가는데, 제작 과정에서 오히려 계획했던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순간도 있지만 이 또한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반복적 공정 속에서 생각을 비우기도 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기도 한다.


‘Song of Pebbles’(2024). 고혜정 작가는 자연의 여러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으로 재구성한다. 그녀의 작품은 수풀 속, 바위 위, 어떤 자연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Song of Pebbles’(2024). 고혜정 작가는 자연의 여러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으로 재구성한다. 그녀의 작품은 수풀 속, 바위 위, 어떤 자연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은을 주재료로 작업한다. 다른 금속에 비해 그 비중이 압도적이다

은이 내 작업세계가 지향하는 표현과 가장 잘 맞는 재료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은을 사용해 왔고, 지금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은은 금속이지만 빛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매우 섬세해서 단단한 물성 안에서도 유연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이 서서히 변하고, 사용하는 환경에 따라 미묘하게 색이 깊어지는 과정이 자연의 흐름과 닮았다. 금속이라는 물질이 가진 견고함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 자연의 연약함이나 흐름, 생명의 기운을 담아내고 싶고, 그런 점에서 은은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빛나면서도 과하지 않게 작품의 섬세한 결을 드러낼 수 있다. 나에게 은은 단순한 재료라기보다 작업의 감각과 태도를 가장 잘 전달해 주는 매개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은을 대하는 방식과 이해도 조금 깊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형태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점점 은이 가진 빛의 결이나 표면의 변화, 시간에 따라 축적되는 흔적에 더 주목하게 됐다. 은이라는 재료를 계속 사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감각과 표현의 폭은 훨씬 넓어지고 있다. 같은 재료를 통해 내 작업이 조금씩 깊어지고 확장되는 느낌이다.


‘Dandelion drop’(2020).

‘Dandelion drop’(2020).

대표작 ‘소원들(The wishes)’은 은으로 만든 3000개 이상의 민들레 홀씨를 이어 붙여 하나로 군집시킨 작품이다

‘소원들’은 비정형적인 항아리의 형상을 바탕으로 한 작업이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실제는 항아리 형태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안에 담긴 의미에 깊이 공감하게 됐다. 신화 속에서 판도라가 항아리를 여는 순간, 세상의 온갖 고통과 불행이 쏟아져 나오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건 ‘희망’이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희망을 품고 소원을 비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간절함을 담아낸다. ‘소원들’은 이렇게 다양한 소원의 형태를 ‘희망을 담은 항아리’로 풀어낸 작업이다. 일정한 형태가 아닌, 서로 다른 굴곡과 흐름을 가진 구조는 각기 다른 소망과 감정을 담아낸다. 그래서 이 작업은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품고 있는 희망과 다름을 담아낸 하나의 그릇이라고 볼 수 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지금의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줬나

제주도라는 지역적 환경도 특별했지만, 무엇보다 어린 시절 생활했던 공간에 대한 기억이 강하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꽃과 나무, 분재를 접했고, 부모님께서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자연이 어떤 풍경으로 기억되기보다 늘 곁에 있는 존재가 됐다. 이런 경험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작업 속에서 드러난다. 형태를 만들 때도 인위적으로 자연을 재현하기보다 이미 내 안에 체득된 감각이 흘러나온다. 내 작업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관찰의 결과라기보다 오랜 시간 일상에서 층층이 쌓인 감각이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선보인 다른 작품에도 자연의 기억과 흔적이 반영된 걸 알 수 있다

2020년 작인 ‘Forest Mind’는 소나무 숲을 거닐며 떨어진 솔잎을 모으던 순간, 숲이 내게 준 고요함을 형태로 만든 것이다. 2024년에 선보인 ‘송 오브 페블스(Song of Pebbles)’는 제주 몽돌 해변에서 파도가 빠져나간 자리, 자갈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Forest, mind’(2020). 수많은 홀씨가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민들레 씨앗은 그녀가 가장 주목하는 모티프다.

‘Forest, mind’(2020). 수많은 홀씨가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민들레 씨앗은 그녀가 가장 주목하는 모티프다.

‘Dandelion bowl’(2021).

‘Dandelion bowl’(2021).

이탈리아 호모 파베르 최우수작가상, 청주국제공예공모전 대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벨기에의 보고시안 재단이 주관하는 디자인 & 공예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내 작품이 금속이라고 연상하기 어려울 만큼 섬세하고, 디테일에 대한 집요한 접근과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금속이 가진 물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얘기도. 최근의 여러 수상을 통해 오랫동안 고민했던 작품의 방향, 즉 단단한 금속 안에서 얼마나 섬세하고 유연한 감각을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시도가 원활하게 전달되고 있는 걸 알았다.


은 이외의 재료에 대한 확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은이 가진 섬세함과 깊이에 대해 여전히 큰 매력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표현의 확대도 고민하고 있다. 금속과 다른 물성을 가진 재료, 특히 나무에 다시 관심을 두고 있다. 이전에 나무로 가구나 손잡이 등을 제작했던 적 있는데, 금속과 나무가 만날 때 생기는 대비와 균형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앞으로 이질적 재료들을 접목해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확장된 감각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재료를 선택하는 과정은 특정한 물질을 정하기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각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물성을 찾는 데 더 집중한다. 결국 재료는 형태를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작업의 감각을 드러내는 또 다른 언어이기 때문이다.


‘Beyond time’(2025). 은은 고혜정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 다른 금속도 사용하지만 가장 주력하는 것은 은이다.

‘Beyond time’(2025). 은은 고혜정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 다른 금속도 사용하지만 가장 주력하는 것은 은이다.

‘Dandelion dish’(2021).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도 고혜정 작가에게는 중요한 영감이 된다.

‘Dandelion dish’(2021).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도 고혜정 작가에게는 중요한 영감이 된다.

하반기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

오는 9월 파리에서 전시를 연다. 해외에서 여는 첫 개인전인 만큼 현지 관람자들이 내 작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된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내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읽히고 공감되는지 지켜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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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정윤주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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