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가구 작가 김민재가 뉴욕 집의 녹색 다이닝 룸에 채운 것들

이름 없는 녹색 벽, 마감재 없이 4년을 버틴 미송 식탁, 이른 오후 파티오 바닥에서 반사된 빛. 가구 작가 김민재의 뉴욕 집에는 완성을 서두르지 않은 시간의 결이 있다.

프로필 by 이경진 2026.06.27

이른 오후가 되면 파티오 바닥에 반사된 빛이 녹색 다이닝 룸 벽 위로 옮겨 앉는다. 가구 작가 김민재가 이 집에서 사랑하는 순간 중 하나다. 하지만 보통 그 시간에 김민재는 집에 없다. 작업실에서 작업을 한다. 주말이 되어 빛이 옮겨 다니는 오후 풍경과 마주하면 그에게는 더없이 귀한 시간이 주어진다. 격자형 천장과 원래의 몰딩, 묵직한 셔터가 남아 있는 한 채의 전후(戰後) 건물.

격자형 천장과 클래식한 몰딩이 남은 거실 한가운데, 작가가 5년간 아껴온 미송 식탁이 자리한다. 인위적 마감 없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테이블.

격자형 천장과 클래식한 몰딩이 남은 거실 한가운데, 작가가 5년간 아껴온 미송 식탁이 자리한다. 인위적 마감 없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테이블.

자신의 공간을 이곳에 마련하기로 결정한 그가 중요하게 여긴 건 큰 식탁을 놓을 다이닝 공간과 자신의 작업이 들떠 보이지 않도록 ‘시간의 켜’가 쌓인 환경이었다. “조금이나마 포멀한 레이아웃이 있는 ‘프리-워 건물(Pre-War Building;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지어진 건물을 가리키는 미국식 표현)’ 위주로 알아봤어요.” 처음 이 집에 들어선 순간, 그가 놀란 것은 사진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 공간감이었다. 문틀에 남아 있는 이스트레이크(Eastlake)풍의 장식은 덤이었다.


가구 작가 김민재.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보다 허술함에서 나오는 포근함을 사랑하는 그를 닮은 집에서.

가구 작가 김민재.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보다 허술함에서 나오는 포근함을 사랑하는 그를 닮은 집에서.

김민재는 군더더기가 있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공간이 필요했다. “큰돈과 시간을 들여 완벽하게 작업하지 않아도 허술함에서 포근한 분위기가 나오길 바란 것 같아요.” 그가 만든 묵직한 미송 식탁,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 벽난로 장식의 가구는 그렇게 시간의 결을 머금고 천천히 자리를 찾아갔다. 볕이 잘 드는 다이닝 룸의 벽은 녹색이다. 정확하게는 이름이 없는 색이다. 인테리어 작업을 할 때 모아둔 녹색 방의 레퍼런스를 떠올리며 페인트를 칠하고 보니 약간 과한 형광빛이 돌았다. 마침 함께 있던 어머니 이명애 작가와 함께 가게로 달려가 크림색 페인트를 사왔고, 두 색을 적당히 섞어 마감했다.


2022년 뉴욕에서 어머니와 함께 연 전시가 오픈하기 전의 일이었다. “결국 이름 없는 색의 방이 돼버렸어요.” 그 안에 그가 만든 가구와 어머니의 그림이 자리를 잡았다. 방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미송 식탁은 4~5년 동안 마감재를 칠하지 않은 채로 쓰여왔다. 작가 정신 반, 게으름 반이라며 농담처럼 말해도 그는 기름때와 와인, 소스로 얼룩진 표면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2년 전 부모님이 식탁 한가운데 쌓인 촛농을 긁어냈을 때 꽤 속상했다고 한다. “반짝반짝 통유리를 얹은 테이블보다 이런 기억이 묻어 있는 가구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이름 없는 색이 주는 위안. 빛이 들 때면 형광빛이 감도는 이 오묘한 벽면은 그가 만든 묵직한 가구들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배경이 된다.

이름 없는 색이 주는 위안. 빛이 들 때면 형광빛이 감도는 이 오묘한 벽면은 그가 만든 묵직한 가구들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배경이 된다.

구석구석 쌓인 책들과 낮게 깔린 조명들.

구석구석 쌓인 책들과 낮게 깔린 조명들.

다이닝 룸을 채운 가구의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분홍색 참나무 커피 테이블, 삼나무와 유리섬유로 만든 스탠드 조명 ‘데이브’, 피시 체어와 템플 체어, 키서 체어에 이르기까지. 벽과 벤치 위쪽에 걸린 그림은 어머니의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그림과 함께 자라면서 화풍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그는 어머니 그림 없이 유학했던 시간이 오히려 어색했다고 회상한다.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어머니의 회화 세계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 2022년 뉴욕의 모자(母子) 전시도 떠올린다. “그때 들여온 작품 덕에 작업실과 집을 꾸밀 수 있었어요(웃음).”


삼나무와 유리섬유로 만든 스탠드 조명 ‘데이브’가 주방 한편을 밝힌다. 가지런히 정리된 기물들과 작가의 작품이 공존하는 풍경.

삼나무와 유리섬유로 만든 스탠드 조명 ‘데이브’가 주방 한편을 밝힌다. 가지런히 정리된 기물들과 작가의 작품이 공존하는 풍경.

오픈형으로 넓게 펼쳐진 공간이 아니라, 짜임새 있게 분할된 집에서 그가 둘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 않았다. 늘 제약과 함께 작업해 온 그에게 이 집은 또 다른 제약이자, 새로운 작업을 핑계 삼을 수 있는 장이었다. “이 집을 찾는 과정도 재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거실과 식사 공간을 명확히 구분한 이유도 비슷하다. 식탁에 맞춰 의자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와 디자인,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공부할수록 깊어지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있다. 2021년 로스앤젤레스 마르타 갤러리에서 열었던 첫 개인전은 그런 간극을 무너트리려는 시도였다. 서양건축사를 공부하며 생긴 의문과 이질감, 소유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싶었다고 한다. 거주 공간을 자신의 작업으로 채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시도해 보고 싶었던 구상을 직접 해보고 경험할 수 있었어요.”


건축과 학부 시절, 그는 안도 타다오와 페터 춤토르 같은 건축가에게 빠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디자인을 시뮬레이션처럼 다뤘고, 그런 거리감이 늘 아쉬웠다. 한 학기 동안 손으로 재료를 다루고 목업과 완성품까지 만드는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의 경험은 그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 학기에 느낀 성취감을 그 후로도 계속 좇아왔다. 졸업 후 지안카를로 발레 사무실에서 일했고, 다시 자신의 목공소를 차렸다. 지금은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내 작품이 디자인인지, 조각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조각적 요소에 집중하다 보면 가구로서 정체성이 떨어지는 것 같단다. “어쩌면 저는 가구 혹은 디자인에 묻어 있는 일상의 무료함을 지우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종종 살면서 필요한 물질적 요소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나무 수납장은 붉은 안료를 칠한 내부 공간과 대비를 이룬다.

나무 수납장은 붉은 안료를 칠한 내부 공간과 대비를 이룬다.

첫 개인전 이후 한동안 회화적 물성에 집중했던 그는 요즘 다시 조명이나 의자 같은 디자인 오브제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도 좀 더 간결하고 명확하게, 어느 정도는 반복 생산이 가능하도록 말이다. “디자인 작업을 계속하려면 반복성도 중요한 요소 같아요.”


집 곳곳에 친구이자 동료 작가들의 작품이 놓여 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소렌 퍼거슨의 화병, 거실에는 샤이나 타박이 디자인한 아코디언 램프, 창가에는 재커리 화이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황금 장어’가 걸려 있다. 처음 작업실을 차리고 막 돈을 벌기 시작할 무렵, 주변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거나 교환하곤 했다. 샤이나의 램프는 거의 2년간 문의를 했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게 의문이어서 결국 스스로 구입했다. “그때는 시작하는 사람의 근본 없는 여유 같은 게 있었나 봅니다(웃음).”


구석진 공간에서도 김민재의 감각과 취향이 보인다.

구석진 공간에서도 김민재의 감각과 취향이 보인다.

다이닝 테이블 곁에 둔 의자들. 김민재 작가의 작품이다.

다이닝 테이블 곁에 둔 의자들. 김민재 작가의 작품이다.

김민재의 애착 공간은 집에 딸린 작은 파티오다. 첫해부터 난간에서 키워온 덩굴식물들이 자란다. “가장 정직하게 혹은 시간에 의존하는 존재라 애정하는 것 같아요.” 자연광은 그가 출근하고 집을 비운 사이에 들어온다. 하루 중 이른 오후에는 파티오 바닥에 반사된 빛이 녹색 다이닝 룸 벽으로 들어오고, 늦은 오후가 되면 반대편 거실 데이베드 쪽으로 빛이 넘어간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높은 창문에는 2층 구조의 셔터가 달려 있어 아래는 닫고 위는 열어둘 수 있다. 셔터 위로 파란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만 보일 때도 있다. 해 질 녘 파티오에 나가면 덩굴식물 너머로 노을이 진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곳저곳 불을 켜는 것 그리고 밥솥에 밥이 있는지 살핀다. “완벽하게 느긋한 날은 손에 꼽지만 가끔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복 같아요.”


모자(母子)의 세계가 만나는 풍경. 벽면을 채운 이명애 작가의 연작과 그 아래에 있는 김민재 작가의 가구들은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모자(母子)의 세계가 만나는 풍경. 벽면을 채운 이명애 작가의 연작과 그 아래에 있는 김민재 작가의 가구들은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는 건축에서 출발해 가구로 향했던 길이 다시 건축 쪽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닫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인테리어 작업도 몇 차례 했다. “파빌리온처럼 작은 스케일의 건축물, 늘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오브제로서의 건축물 혹은 그 이상까지 작업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자신이 만든 가구로 채우고, 어머니의 그림이 함께 호흡하며, 시간의 켜가 천천히 더해지는 한 채의 작은 세계. 빛이 옮겨가는 오후를 기다리며, 김민재는 매일 자신이 만든 세계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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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사진가 이민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