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 성지' 로버트 테리엔의 작업실에 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나는 거대한 식탁과 의자가 가득한 LA 스튜디오. 현대미술 거장 로버트 테리엔의 작업실은 우리 모두의 현실을 단숨에 전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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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엔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약 200평 규모의 스튜디오 외관. 열린 철문 안쪽으로 그가 밤늦게까지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하던 작업 공간이 엿보인다.
LA 다운타운 한복판에 무심한 표정의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다. 지난 30년 동안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던 이곳은 세상을 떠난 현대미술의 거장 로버트 테리엔(Robert Therrien)의 집이자 작업실이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머리 위로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식탁과 의자 다리 사이를 지나면 마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주인공이 된 듯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로버트 테리엔의 홈 스튜디오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정물화이자 현실의 비례가 무너지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열린 문 사이로 강렬한 붉은색과 겹겹이 쌓인 주방 용품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테리엔이 평생을 바쳐 탐구한 수학적 질서와 일상의 경이로움 사이의 긴장감을 볼 수 있는 장면.
그의 대표작인 ‘Under the Table’이 탄생한 이곳에서 평범한 일상 가구는 공포와 경외심을 동시에 자아내는 거대 구조물로 탈바꿈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사물의 크기를 조절함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의 부피를 가볍게 무너뜨리는 것이다. 스튜디오 내부에는 모든 도구가 군대처럼 정렬돼 있다.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서늘한 청결함이 감돈다. 그는 이전 작업실의 크기였던 30x22피트라는 숫자에 집착했다. 약 200평에 달하는 새 스튜디오에 이 규격을 복제한 똑같은 크기의 방 8개를 만든 것은 지독할 정도로 정교한 그의 논리를 보여준다.
어떤 사물이든 크기가 극단적으로 확대되면 기능성이 사라진다.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하게 복제된 접시 더미는 평범한 일상 도구를 낯선 예술적 경험으로 치환한다.
의자 밑에서 시작된 거인의 이야기. 문틀 너머의 방을 가득 채운 로버트 테리엔의 대표작 ‘Under the Table’. 의자 아래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놀던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은 그의 조각 세계를 관통한다.
로버트 테리엔은 이 스튜디오를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 무엇보다 드라마틱한 지점은 그가 창조한 작품과 자신이 이곳에서 영위한 소박한 삶의 대조다. 수 미터 높이의 조각들이 위용을 뽐내는 스튜디오 한쪽 구석, 테리엔의 사적인 공간에는 겨우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작은 싱글 침대와 낡은 주방 용품뿐이다. 192cm에 달하는 장신인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거대한 세계를 창조했지만, 스스로 가장 작은 구석으로 몰아넣은 고독한 은둔자이기도 했다.
실제 가구처럼 자연스럽게 녹슬고 긁힌 자국까지 물감으로 리얼하게 표현한 디테일은 기능성을 잃은 거대 오브제에 새로운 생명력과 진실성을 부여한다.
테리엔이 신던 ‘어마무시’하게 큰 신발을 본 이들은 동화 속 ‘키다리 아저씨’를 상상하곤 한다. 생전의 그는 말수가 적었으며, 음악과 문학을 깊이 사랑했다. 스튜디오 한쪽 벽면은 레코드판으로 가득했고,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말하기보다 글 쓰는 걸 선호했던 테리엔은 인터뷰에서도 극도로 단어를 아끼거나, 지극히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지만, 글로 전하는 스테이트먼트는 언제나 풍성하고 깊었다. 로버트 테리엔은 커다란 몸으로 과묵하게, 자신의 거대한 스튜디오를 부지런히 누볐을 것이다.
로버트 테리엔은 리본이나 눈사람 같은친숙한 기호들의 스케일을 극도로 확대해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예술적 접근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보낸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의 시골집에서 지내며, 할아버지가 직접 가구를 만들고 집을 수리하며 장난감을 만들어주던 경험은 그의 작업에 깊은 자양분이 됐다. 1975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9년 작고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드로잉과 사진, 판화, 조각을 비롯해 하나의 매체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크기의 작업을 선보였다. 1970~1980년대에는 개인적 경험과 할리우드 만화영화의 소재처럼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호출된 모티프를 이용해 단순한 색채와 추상화된 형상을 표현했고, 1990년대부터는 주로 대형 조각 작품을 작업하며 걸리버가 거인국에서 봤을 법한 거대한 테이블과 의자 세트 등 일상의 평범한 오브제를 기념비적 규모의 조각으로 탈바꿈시켜 생경한 감각을 연출했다. 제작할 때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점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해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 미터 높이의 거대 조각들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평범한 크기의 테이블은 로버트 테리엔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로버트 테리엔의 대표작 중 하나인 ‘Under the Table’의 접이식 의자는 4m가 넘는 크기다. 10명 이상의 사람이 힘을 모아야 겨우 펼 수 있다.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어 철을 녹이는 작업부터 시작해 완성한 이 조각은 녹슬고 긁힌 자국까지 물감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어떤 사물이든 크기가 극단적으로 커지면 기능성이 사라진다. 앉을 수 없는 물체가 된 의자로 테리엔은 어떤 이야기를 소환하고 싶었을까. 바로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이다. 그 아래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숨어서 놀던,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정서를 이 같은 추상으로 말하고자 했다.
"예술가에게 세상 모든 것은 소스가 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분류하고 관계 맺는 능력은 일종의 마법과 같아요." 사물을 분류하고 관계 맺는 로버트 테리엔의 작업 철학은 스튜디오의 백미인 ‘레드 룸(Red Room)’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빨간색 사물 888개가 도열한 방은 빨간색 플라스틱 컵과 오래된 라디오, 손때 묻은 옷가지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풍경은 편집증적 수집이 어떻게 경이로운 예술적 풍경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준다. 로버트 테리엔 재단의 공동 디렉터이자 18년간 그의 어시스턴트였던 폴 체르윅(Paul Cherwick)은 당시 테리엔의 스튜디오를 이렇게 회상한다.
로버트 테리엔은 예술가가 세상 모든 것을 분류하고 관계 맺는 과정을 일종의 마법이라 말한다.
“스튜디오는 그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외부 세계에서 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밤늦게까지 홀로 작업하며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하는 데 몰두했죠." 또 다른 디렉터 딘 아네스(Dean Anes)는 스튜디오의 확장이 작품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이 거대한 스튜디오로 옮겨오면서 그의 작품 스케일은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 단순히 조각 작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관람자를 완전히 압도하는 ‘환경’ 자체를 조성하려 했어요.” 로버트 테리엔은 떠났지만, 그가 설정한 엄격한 질서와 수집한 사물들, 현실을 배신하는 조각 작품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우리가 잊었던 일상의 경이로움을 장대한 크기로 선명하게 재현하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사진가 목예린
- 아트 디자이너 김진림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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