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과 보테가 베네타의 이상한 놀이터
리움미술관과 보테가 베네타가 마련한 전시에서 마주한 의외의 풍경. 사람들이 작품을 바라보는 대신 작품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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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열망과 비판적 철학이 응축된 공간. 이토록 사적이고 고유한 세계 같은 미술관에서 의외의 장면을 발견하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어린이날 오후의 리움미술관 전시장이 그랬습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가만히 멈춰 서 있기보다 말그대로 몸을 쓰고 있더군요. 천장 가까이 매달린 거대한 비닐 작품은 마치 놀이기구 같았는데요.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내부로 진입하고 그 움직임의 궤적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작품 위로 그림자처럼 번졌죠. 작품 감상? 이곳에서는 작품을 온몸으로 경험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아 보였습니다.
알렉산드라 카수바, '스펙트럼 통로'
주디 시카고, '깃털의 방'
지난 5월 5일 개막한 리움미술관의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당시 활동했던 여성 작가들의 환경 작업을 현재로 불러왔습니다. 앞서 언급한 ‘환경’은 관람자가 작품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작품의 빛과 소리, 색과 움직임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예술 형식을 일컫습니다. 요즘 흔하게 쓰이는 ‘설치 작품’, ‘몰입형 전시’의 원형인 셈이죠. 1950~1970년대에 걸쳐 환경 예술을 개척했던 여성 작가들의 작업 중 상당수는 전시가 끝난 뒤 해체됐습니다. 기록도 충분히 남지 않았고요. 리움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제외된 예술가들을 비로소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붉은 구조물은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입니다. 일본 가정집 침실의 모기장을 연상시키는 직육면체 구조가 붉은 비닐로 감긴 채 지면에서 약 70cm 떠 있는데요. 이 작품, 묘하게 몸을 끌어당깁니다.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 공간에 잠기는 듯한 몰입의 경지가 펼쳐지고요. 밖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예술적인 퍼포먼스처럼 느껴집니다.
야마자키 츠루코, '빨강(Red)'
마르타 미누힌, '뒹굴고 살아라!'
마르타 미누힌의 ‘뒹굴고 살아라!’는 작품명 그대로 형형색색의 매트리스에서 쉬고 감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인생 절반이 매트리스 위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작가가 손수 꿰매고 채색한 매트리스 조각을 붙여 완성했습니다. 뒤뚱거리는 몸짓에 따라 진동하고 흔들리는 작품은 안에 들인 관람객을 조용한 감상자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안정과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무너뜨리는 훼방꾼이 자신의 무게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이러니함과 즐거운 자극이란.
작품을 거듭할수록 공간은 점점 더 신체와의 거리를 좁히는데요. 196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된 리지아 클라크의 ‘집은 곧 몸: 침투, 배란, 발아, 배출’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반투명 천으로 된 터널과 구조물에 천천히 몸을 밀어 넣을수록 작품명이 확 와닿는데요. 요컨대 탄생의 감각을 체험하게 됩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태어나는 경험’이 이런 건가 싶더군요.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작품 ‘스펙트럼 통로’는 또 어떻고요. 종횡으로 뻗은 압도적 규모의 무지개 빛깔 통로 안을 거닐 수 있는데요. 나일론 천과 네온 조명을 활용한 구조물은 탄생, 죽음,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으로 관람객을 몰입시킵니다.
리지아 클라크 ,'집은 곧 몸: 침투, 배란, 발아, 배출'
알렉산드라 카수바, '스펙트럼 통로'
난다 비고, '거주 가능한 시간 환경'
이번 전시에서 강렬한 장면 중 하나는 한국 작가 정강자의 ‘무체전’입니다. 검은 장막으로 둘러싼 공간에 들어서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머리에서 맴돌 새도 없이 펼쳐져요. 사이렌이 울리고 연기가 퍼지고 관객의 얼떨떨한 얼굴에 광선이 쏟아지는데요. 이윽고 공간을 울리는 작가의 목소리.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빛, 소리, 촉각 요소를 접목해 예술의 경험 방식을 확장한 이 작품은 1970년대 사회 분위기를 은유했다고 합니다. 당시 정치 선동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말았는데요. 고증을 통해 반세기 전 사라진 공간이 충실하게 복원됐습니다.
리움미술관의 전시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보테가 베네타가 후원했습니다. 2023년 강서경의 <버들 북 꾀꼬리>, 2025년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에 이은 보테가 베네타와 리움미술관의 세 번째 협업인데요. 일련의 전시들은 관람객을 그냥 세워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은 인상입니다. 강서경 작가는 시각, 촉각, 청각 그리고 시공간적 차원의 경험을 아우르는 작업을 선보였는데요. 피에르 위그는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이 뒤섞인 유동적 환경을 탐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사에서 누락된 여성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관람객을 예술의 ‘다른 공간 안’으로 이끌어 낯선 감각과 경험을 유도합니다. 과연 우연일까요?
정강자, '무체전'
예술과 연결고리를 가진 패션 브랜드는 꽤 있습니다. 하지만 창의성과 공동체라는 자장 안에서 출발한 보테가 베네타의 행보는 무게감이 사뭇 다르게 느껴져요. 1966년 이탈리아 비첸차에서 장인들의 결합으로 탄생한 보테가 베네타는 수공예와 창의성을 브랜드의 인장으로 삼았습니다. 과거 공방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장소가 아니었는데요. 장인들은 공방을 드나들며 기술을 공유하고 밀도 높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러한 태생적 특징에 기인해 보테가 베테나는 혁신과 탁월함, 수공예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 가치를 품은 창의적 작업을 추구하며 지지해왔습니다. 다양한 문화 후원 활동을 비롯해 예술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 것도 무척 자연스러운 수순일 테고요.
전시 오픈을 기념해 진행된 컬처 다이얼로그. 송주원 안무가와 이경미 영화감독
전시 오픈을 기념해 진행된 컬처 다이얼로그. 문경원 시각예술가 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류성희 미술감독
보테가 베네타가 리움미술관과 마련한 이번 전시는 과거 파격적이고 선구적인 작업을 시도한 여성 작가들을 소환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주류 미술사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여성 작가들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사라진 작품을 복원한 것을 넘어 예술가와 예술가, 예술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가치 높은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러니 작품 앞에 서성이지 마세요. 작품 안으로 들어가야 그 경험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Credit
- 사진 COURTESY OF LEEUM MUSEUM OF ART · BOTTEGA VE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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