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불의 리움미술관 전시 관람을 위한 필독 인터뷰
휴관일의 미술관에서 아티스트 이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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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작가 이불이 밤 비행기에서 처음 떠올린 태양의 도시에서 이어집니다.
지하층 그라운드 갤러리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몽그랑레시’ 연작은 언제나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이불 작가의 사유 체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재진행형 작품군이다. 2005년부터 계속된 이 연작은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제시한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작가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서사 대신 개인과 집단의 기억, 역사의 파편들,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를 뒤섞어 알레고리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2005년부터 전개한 ‘몽그랑레시’ 연작 중 두 번째 만든 초기작으로, 다양한 지리적· 문화적 참조와 서로 다른 유토피아적 비전이 충돌하는 알레고리적 지형도를 보여준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2005).
‘몽그랑레시’ 연작들이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며 복잡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천지’(2025, 2007년 작 개작)의 검은 호수 표면에 ‘스턴바우 No.1’(2006)이 비치는 모습이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1987년 민주화운동 희생자인 박종철 열사를 떠올리게 하는 욕조와 알프스 산 정상의 신전에서 유리 위성을 쏘아 올려 도시를 구현하려 했던 브루노 타우트의 개념을 참조한 샹들리에를 병치했다. 옆에는 도시의 폐허를 잘라 보여주는 듯한 ‘발굴(2007)’이 성수대교 붕괴 참사를 떠올리게 하며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늘 그렇듯 선글라스를 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갇혀 있는 거대한 빙하 작업 ‘해빙(다카키 마사오)’(2007)은 잘못된 주소로 떠내려온 듯한 모양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중 하나로 시범 철거된 감시초소의 폐자재를 재구성한 타워 ‘오바드 V’(2019)는 색색의 LED 조명이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에 대한 사실을 점멸하며 작가의 메시지를 빗댄다. 마지막으로 기울어진 배를 형상화한 ‘스케일 오브 텅’(2017~2018)은 세월호 참사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이 모든 작품 사이를 오가며 기이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거나, 불편한 진실에 대한 통렬한 공감에 잠기는 순간이 반복됐다. “제 작업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것이 많아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불합리하거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맞서면서 저는 어떻게든 직면하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죠. 이 습관은 제 사고방식이자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한국 사회에는 이미 여러 번 겪은 일들이 갑자기 처음처럼 느껴지는 ‘자메뷔(Jamais Vu)’ 같은 현상이 만연하잖아요. ‘앞으로 나아가야지’ ‘과거에 얽메이면 안 된다’며 망각이 최선인 것처럼 치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트라우마는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게 진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존재이기에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내포한다.
 
  종말론적 미래의 한 시점에 발굴된 도시 폐허의 단면과 같은 모습으로 상실과 트라우마를 체감하게 하는 ‘발굴(2007)’과 함께 포즈를 취한 이불.
특히 이불 작가는 ‘불(日出; 새벽 해가 막 떠오르는 순간)’이라는 신화적 이름을 지어준 부모 덕분에 늘 남과는 다른 환경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0년 유신정권 시절, 반체제 활동을 벌이던 부모 곁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탄압의 한복판에 놓였다. 어머니가 투옥된 기간 동안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집집마다 수시로 드나드는 공안 당국의 감시를 피해 이사를 반복해야 했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가방에 구슬을 달고 뜨개질로 옷을 만들던 모습이다. 이불 작품에 등장하는 비즈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외양과 달리 ‘한국 경제 발전에 따른 저임금 여성의 육체노동’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작가는 “유년 시절에 겪은 다양한 문제적 경험들과 그것이 내 정서에 미친 영향 사이의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예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40여 년에 걸친 작품 활동 속에서 그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돌이켜보면 저는 작업을 통해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새로운 의문이 생기곤 했어요. 의심이 제 직업이기도 하니까요(웃음). 언제나 의심과 불합리함이 작동하고 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합리함이 예술 창작의 원동력일지도 몰라요. 결국 인생 전체에 걸쳐 체득한 경험과 감정이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되고 확장되기 때문에 해소라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비아 네가티바’(2022, 2012년 작 재제작) 내부에 선 작가 이불.
 
  ‘몽그랑레시’와 ‘취약할 의향’ 등과 연계된 이미지와 내용을 다층적으로 콜라주해 사변적 소우주처럼 재구성하는 벨벳 평면 연작 중 ‘무제(취약할 의향-벨벳 #15)’(2021).
촬영을 위해 이불은 거울과 조명이 어우러진 미로 설치미술 작품 ‘비아 네가티바’(2022, 2012년 작 재제작) 내부에서도 포즈를 취했다. 수많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작가는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허상이라는 걸 알아요. 거울이 사용된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각도를 여러 개 만들어 왜곡을 심하게 해요. 깨진 거울을 통한 디스토션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비아 네가티바’의 미로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리플렉션은 사실 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이죠.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파편화된 이미지를 모아 다시 재조립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사실 자아라는 개념은 근대에 만들어졌는데, 만들어진 순간부터 우리 사고 체계와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 됐어요. 그 자아라는 갑옷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을 통해 꿈꾸는 바입니다.”
작가는 ‘비아 네가티바’ 같은 작품은 “그 내부로 들어가서 허상과 왜곡된 경로를 만나고, 출구를 찾기 위해 헤매는 관람자가 반드시 있어야 완성된다”고 말했다. 반드시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1980~1990년대 등산용 밧줄에 몸을 고정해 거꾸로 매달린 채 최승자의 시를 읊는가 하면(‘Abortion’, 1989), 촉수가 덜렁거리는 소프트 조각을 입고 김포공항에서 출국해 일본 도쿄 거리를 누비기도 하는 등(‘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1990) 신체를 매개로 삼은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줄리언 제임스가 쓴 <의식의 기원> 페이지들이 어지럽게 붙은 ‘비아 네가티바’(2022, 2012년 작 재제작). 거울과 조명으로 조각난 자신의 허상과 왜곡된 경로를 만나 출구로 나오면 작품 외벽에서 인간 의식이 본질적이고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와 환경, 언어 발전 속에서 상대적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밝힌 문장을 읽을 수 있다.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은 <이불-시작> 전시에서 이 시기에 펼쳐진 그의 전위적인 퍼포먼스 작업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는 그 이후의 흐름을 잇는 후속편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작업에 대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도 “신체가 겪는 경험에 대한 일종의 직감 같은 것이 발달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경험이 ‘비아 네가티바’의 특정 구간, 예컨대 통로 폭을 60m로 설정하는 등의 세부 설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제가 퍼포먼스를 하며 겪었던 파편화된 경험을 끌어와 다른 작품에 자연스럽게 적용시키는 것 같습니다.” 1980년대 홍익대학교 조소과 재학 시절 연극반 활동에 몰두하며 퍼포먼스와 소프트 조각으로 사회제도와 권력 구조, 젠더 문제를 과감히 드러냈던 이불은 1990년대에 작품세계 확장의 전환점을 맞았다.
계기가 된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킨 ‘장엄한 광채’(1997)다. 1997년 이불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프로젝트 57: 이불/치에 마쓰이>에 초대돼 금빛 그물로 감싼 생선을 냉장 유리 케이스에 담은 설치미술 작품 ‘장엄한 광채’를 선보였다. 그러나 전시장을 가득 메운 악취 때문에 개막 전날 작품이 철거됐다. 이후 미술관 인근 호텔에 보관 중이던 작품은 전설적인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에 의해 재조명돼 제4회 리옹 비엔날레에 초청됨으로써 생선이 서서히 부패하는 과정을 통해 후각을 미술사의 감각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한국이라는 제한된 맥락을 넘어 국제 무대에서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고민하던 이불은 그런 경험을 밑거름 삼아 전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거장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이불에게 보호처가 돼주지 못한 집과 대조적으로 안식처이자 놀이터로 기능한 벙커에 한국 근현대사의 문맥 등을 다층적으로 엮어낸 ‘벙커(M. 바흐친)’(2007/2012) 앞에 선 이불.
2024년,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에 초청돼 총 4점의 ‘롱 테일 헤일로’(2024)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 그중 한 점(‘롱 테일 헤일로: CTCS #1’)이 공개되고 있는데, 30년 만에 다시 뉴욕을 찾은 소감에 대해 그는 “그 장소의 상징성을 잘 알기 때문에 제안받았을 때 매우 기뻤고, 도전해 볼 만하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과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라고 말했다.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의 파사드 벽감에 설치된 이 작품은 멀리서 보면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같은 고전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갑옷과 옷 주름, 기계장치, 건축적 파편들이 뒤섞인 형태를 드러낸다. 작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백과사전적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그 참조는 고대 조각부터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미래주의 조각, 피카소와 페르낭 레제의 큐비즘 작품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양식을 가로지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건축 언어가 매우 확실한 곳이라 그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도 합창처럼 들렸어요. 그 합창에 조화롭게 어우러질 목소리를 더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죠.” 그는 또 “9개월 동안의 설치 기간에 이 작품 앞을 오가는 관광객이나 계단에 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에게 매일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듯한 경험이 됐으면 했어요”라고 덧붙였다.
‘유동적 아이덴티티’를 지닌 ‘롱 테일 헤일로’는 벽감에서 내려온 지금, 이불 작가의 새로운 ‘디벨롭’을 기대하며 계속 진화할 예정이다. 리움미술관과 홍콩 현대미술관 M+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내년 1월 4일 한국에서 막을 내린 후 3월부터 홍콩 M+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후에는 2027년 하반기까지 주요 해외 미술관을 순회하며 전 세계 관람자들과 만남을 이어갈 계획이다. 또 세계적 출판사 템스앤허드슨과 협력해 이불의 첫 모노그래프가 출간될 예정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60대에 접어든 이불의 전례 없는 예술적 여정은 또 한 번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컨트리뷰팅 에디터 안동선
- 사진가 김형상
- 사진 ©LEE BUL·PATRICK GRIES·전병철·WATANABE OSAMU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THE ARTIST·LEEUM MUSEUM OF ART·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MORI ART MUSEUM(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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