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작가 이불이 밤 비행기에서 처음 떠올린 태양의 도시

휴관일의 미술관에서 아티스트 이불을 만났다.

프로필 by 이경진 2025.10.31
‘비아 네가티바’(2022, 2012년 작 재제작) 내부에 선 작가 이불.

‘비아 네가티바’(2022, 2012년 작 재제작) 내부에 선 작가 이불.

길이 17m의 메탈릭한 비행선 형태의 풍선이 천장에 매달려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다. 렘 콜하스가 설계한 육중한 블랙 콘크리트 박스를 배경으로 이 거대하면서도 취약하고, 아름답지만 불안정한 몸체를 드러내는 비행선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불: 1998년 이후>는 조각과 설치미술, 평면, 드로잉, 모형 등 작가 이불의 총 150여 점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대규모 서베이전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전시 도입부는 그의 대표작인 ‘취약할 의향 - 메탈라이즈드 벌룬’(2015~2016/2020)이 장식한다.


이불은 전시마다 공간과 작품이 강렬한 대화를 나누도록 예측 불허의 풍경을 조성해 왔다. 도입부 작품 배치의 이유를 묻자, 그는 설명했다. “리움미술관의 공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 기획 초기부터 명확한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통창과 연결된 외부 출입부에서부터 작품을 볼 수 있고, 이 슬로프 공간의 크기가 작품 설치에 적합했어요. 무엇보다 작품의 사운드가 공간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관람자를 몰입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사물의 달콤함을 경계하라)’(2007)와 ‘무제(M4)’(2014) 사이에 선 이불.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사물의 달콤함을 경계하라)’(2007)와 ‘무제(M4)’(2014) 사이에 선 이불.


20세기 초 독일은 비행선으로 하늘을 지배했지만, 힌덴부르크호의 비극적 사고로 그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체펠린(Zeppelin)’이라는 용어는 이런 비행선을 만든 독일 발명가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의 이름에서 따온 보통명사다. 저음의 ‘우웅’ 하는 소리를 들으며 체펠린의 최후를 떠올려본다. 1937년 5월 6일, 미국 뉴저지 레이크허스트 해군항공기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한 힌덴부르크호의 도착을 기다리는 수많은 취재진과 구경꾼으로 붐볐다. 헬륨 수출 제재로 수소로 채워져 있었던 힌덴부르크호는 착륙 준비 중 항공기지 상공에서 갑작스럽게 폭발했고, 97명의 승선 인원 중 35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현장에서 보도 중이던 기자 허버트 모리슨은 그 순간의 충격을 “오, 인류여(Oh, the humanity!)!”라는 절규로 표현했으며, 그 목소리는 지금도 당시의 비극적 순간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번 전시가 전반적으로 “오, 인류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고 하자, 이불은 “그 비통한 절규 뒤에 얼마나 많은 말이 함축돼 있겠습니까?”라며 체펠린을 형상화한 배경을 밝혔다. “비행선의 대명사였던 체펠린은 그 사건으로 역사의 페이지를 닫았지만 여전히 상징적 기호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이상, 그 실현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하죠. 저는 인류가 자신의 취약성을 인지하면서도 더욱 높은 목표를 품고,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도전하는 과정을 계속 탐색해 왔어요.”


크리스털과 유리, 아크릴 비즈, 체인으로 브루노 타우트의 공상적 · 건축적 비전과 실현되지 못한 꿈이 남긴 멜랑콜리를 재해석한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사물의 달콤함을 경계하라)’(2007).

크리스털과 유리, 아크릴 비즈, 체인으로 브루노 타우트의 공상적 · 건축적 비전과 실현되지 못한 꿈이 남긴 멜랑콜리를 재해석한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사물의 달콤함을 경계하라)’(2007).


블랙박스 전시실에 들어서면 천장에 매달린 ‘사이보그 W6’(2001)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러 차례 전시에서 봤지만 그 강렬한 상징성과 존재감은 언제나 새롭고 압도적이다.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몸과 우아한 비례, 관능적인 포즈는 초월적 힘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머리와 팔다리 일부가 잘린 채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은 냉소적 전망을 드러낸다. 대각선 방향에 있는 어둠 속에서는 생물학적 형상과 기계적 요소, 외계 생명체를 뒤섞은 듯한 ‘무제(아나그램 레더 #11 T.O.T.)’(2003/2018)가 신비로운 존재감을 자아낸다. 이 두 작품은 서로의 거울이자, 공통된 기반 위에서 변형된 도플갱어처럼 ‘아나그램’(단어의 철자와 음절을 뒤섞어 새로운 단어와 의미를 만드는 일) 관계에 있다.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없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15~2016/2020).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없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15~2016/2020).

 개인과 집단의 서사, 현실과 이상,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공간을 제시하며 시대보다 먼저 코인 노래방 형태를 예견한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2000, 1999년 작 재제작).

개인과 집단의 서사, 현실과 이상,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공간을 제시하며 시대보다 먼저 코인 노래방 형태를 예견한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2000, 1999년 작 재제작).


이불은 과거 “완전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실현되면 ‘사이보그’가, 실패하면 ‘괴물’이 되는 것”이라고 한 적 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기술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아이디어가 여전히 우리 미래의 비전으로 작동하는 것이 놀라웠고, 이 메커니즘을 탐구한 것이죠.” 이 두 점의 연작은 이번 전시의 핵심 축인 ‘몽그랑레시(Mon Grand Récit)’(2005~) 연작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주제와 재료, 방법이 달라 보여도 이불의 40년 작업은 깊은 내적 연관성을 지니며 지속적으로 확장돼 왔다. 인터뷰에 함께 자리한 리움미술관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이불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인류가 좇아온 이상과 비전은 처음엔 신체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시작해 결국 풍경과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돼 왔어요. 형태나 재료와 무관하게, 그 주제와 메커니즘은 밀도 높은 연관성을 유지하며 발전해 왔죠”라고 말했다.


이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설치미술 작품은 ‘몽그랑레시’ 연작의 하나인 ‘태양의 도시 Ⅱ’(2014)다. 이 작품은 17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를 모티프로 삼았으며, 벽과 바닥을 감싸는 거울 조각과 LED 조명이 수많은 환영과 왜곡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나는 달콤한 꿈과 왜곡된 현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뒤엉킨 미로에 빠진 듯한 몰입감을 경험하며 작품 속을 떠돌았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Ⅰ’(2000, 1999년 작 재제작) 속에서 어느 관람자가 부르던 마돈나의 ‘Like a prayer’가 ‘먼 북소리’처럼 들려와 더욱 아득해졌다.


 ‘태양의 도시 II’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사이보그 W6’ 등이 어우러진 블랙박스 공간.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장면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혼합된 시간대가 모호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불은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현재로 되돌아온다는 의미로 관람자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선택하고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태양의 도시 II’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사이보그 W6’ 등이 어우러진 블랙박스 공간.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장면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혼합된 시간대가 모호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불은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현재로 되돌아온다는 의미로 관람자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선택하고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감각은 지난 9월 27일 리움에서 열린 전시 연계 프로그램, 이불 작가와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이 참여한 아티스트 토크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태양의 도시 Ⅱ’의 제작 계기에 대해 묻자, 이불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밤 비행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전시 설치를 마치고 밤 비행기를 타서 도쿄 시내를 내려다본 순간, 도시의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빛나며 절박한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시 몇 년 전 발생한 일본 대지진의 기억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 순간 자연스럽게 ‘태양의 도시’라는 제목이 떠올랐어요. 이후 여러 단초를 바탕으로 리서치를 반복하며, 캄파넬라의 도시계획까지 탐구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제작 과정의 비밀스러운 초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자, 작가는 말했다. “저는 반드시 출발점인 단초를 메모하거나 드로잉으로 남겨두는 습관이 있어요. 출발점만으로는 작업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사유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작업이 중요해요. 작가마다 고유한 방식이 있겠지만, 저는 시각적 인상과 언어적 사고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무수한 레퍼런스가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과정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편입니다.” 이때 회화와 조각의 차이도 흥미롭다고 덧붙였다. “회화는 그런 생각을 실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고를 심화시킬 수 있는 반면, 조각은 물리적 조건과 제약을 철저히 고려해야 하기에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높이 17m에 달하는 벽면을 가득 메운 드로잉과 주요 작품 모형 아카이브를 모아놓은 섹션은 물리적 제약과 마주하며 끊임없이 실험하는 조각가의 치열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창이다.


인터뷰는 작가 이불의 리움미술관 전시 관람을 위한 필독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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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컨트리뷰팅 에디터 안동선
  • 사진가 김형상
  • 사진 ©LEE BUL·PATRICK GRIES·전병철·WATANABE OSAMU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THE ARTIST·LEEUM MUSEUM OF ART·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MORI ART MUSEUM(TOK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