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드로잉의 비밀

일러스트레이터 사라 마페이스의 이토록 낯선 정물화.

프로필 by 권아름 2025.10.10
‘Plantes 01’.

‘Plantes 01’.


수작업 특유의 온기가 느껴지는 사라 마페이스(Sarah Maffe′ïs)의 작업은 놀랍게도 디지털 드로잉으로 완성된다. 룩셈부르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그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 경계의 어딘가에서 미묘한 감각을 자극하며 보는 이의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그의 손끝에서 재해석된 일상의 사물은 본래의 용도와 맥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열 속에 자리 잡는다. 그렇게 의도와 우연이 어우러진 장면에서 익숙한 사물은 낯설고 신선한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Fruits’.

‘Fruits’.


‘Printemps Milanais’.

‘Printemps Milanais’.


평범한 사물의 형상이 공항 검색대의 엑스레이처럼 투명하게 겹쳐진 장면이 인상 깊다. 디지털 작업인데도 화면 너머로 종이 특유의 질감이 느껴진다. 이처럼 독특한 표현 방식을 어떻게 구축했나

사물과 가구에 대한 애정으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물을 보다 구조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림을 그릴 때도 전통 방식보다 내부 구조가 보이도록 투명한 레이어처럼 묘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특히 자연에서 마주할 수 있는 질감들, 가령 돌이나 나무, 사포로 문지른 유리 텍스처에 깊이 매료돼 이런 감각을 표현하는 데 집중해 왔다. 유독 종이 질감을 좋아해서 예쁜 텍스처의 종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집 안에 온갖 종류의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다. 다양한 질감을 디지털 드로잉에 녹여내기 위해 여러 기법과 텍스처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체리와 복숭아, 전구, 장미, 글러브, 네크리스 등이 어우러진 드로잉 속 오브제들이 신선하다. 때로는 이질적이기도 한 오브제를 조합하는 기준이 있는지

대부분 나의 상상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어떤 오브제를 고를지는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어떤 감정이나 순간을 환기하는 단순한 물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고전 회화 속의 여성을 정물화처럼 재해석하는 드로잉 시리즈를 시작했다. 원작이 정물화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사물이 만들어내는 정서와 분위기를 분석하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꽃이나 채소처럼 자주 등장하는 오브제도 배치나 채광, 표현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전달하니까.


감정이나 기억을 기반으로 그림 속 사물을 구성한다는 말인가

풍경이나 냄새 같은 감각적 요소도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예를 들어 ‘어릴 적 집에서 보낸 늦여름 오후’라는 테마가 떠오르면 그 기억을 바탕으로 오브제와 색을 하나씩 조합해 나간다. 의자나 식기, 식물 같은 오브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내게 가장 평화롭고 기분 좋은 기억과 연결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식사 혹은 혼자 조용히 커피를 즐기는 시간은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경험이다. 반면 고전 회화를 재해석하는 작업에선 약간 다른 접근을 취한다. 오브제를 빠르게 스케치하고, 시간과 공을 들이는 건 주로 구도와 색이다. 그래야 내 감각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이 된다.


‘Capucines’.

‘Capucines’.


‘Pink Peaches’.

‘Pink Peaches’.


‘Red Diner’.

‘Red Diner’.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의 방향이 제각각이고, 비정형적인 경우도 많다. 이런 구도를 잡을 때 처음부터 완성된 이미지를 그리나? 아니면 작업하면서 점점 방향을 찾아가는 편인지

가장 먼저 시점을 정한다. 정면인지, 위에서 본 시점인지 혹은 이 둘을 혼합한 것인지. 다음 순서로 캔버스 포맷을 결정하는데, 일종의 틀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매우 직관적으로 구성해 나간다. 구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는 늘 불편한 상태로 그리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명확한 법칙은 없지만, 어딘가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감각은 항상 따라다닌다.


그림 속 사물이 놓인 공간은 현실의 장소라기보다 완전히 허구일지도 모르겠다

작업의 대부분은 상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허구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사물을 그리는 것뿐 아니라 그 사물이 놓일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큰 흥미를 느낀다. 머릿속에는 영화 세트처럼 자유롭게 변하는 무대가 펼쳐져 있다. 이 공간에서는 소품이나 배경, 조명까지도 즉흥적으로 바뀐다. 비록 캔버스 위의 그림은 정적이지만 내게는 그 안에서 장면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영화에서 얻는 영감이 내 작업 세계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니며 관찰 드로잉을 하는 것이 아이디어를 얻는 한 방법이라고 들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섬세할 것 같은데, 관찰하는 자세는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인가

크게 의식하진 않지만, 밖에 나가면 바닥의 질감이나 작은 곤충 같은 게 유독 잘 보인다. 덕분에 덜렁대거나 주변을 놓치기도 하지만, 작업엔 도움이 되니 다행이다(웃음).


오늘 스치듯 마주한 사물 중에서 꼭 그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침 산책 중 늘 다니던 길목에서 처음 보는 꽃이 피어 있는 걸 봤다. 아주 사소한 장면이지만, 내겐 그런 순간이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든다.


사라 마페이스의 작업을 한 장의 레서피 카드에 비유한다면 그 안에 들어갈 주재료 세 가지는 자연 소재 한 스푼, 인공적인 오브제 하나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그러데이션과 질감의 조화.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COURTESY OF SARAH MAFFE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