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매기 햄블링의 작업실과 인터뷰
찬사와 논란을 동반한 예술가 매기 햄블링이 말했다. “논란을 일으키려고 한 적은 없어요.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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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매기 햄블링. 뒤편의 작품은 ‘Certain’(2017).
캔버스에 서로 다른 색의 물감 줄기가 선연하다. 흘러내리는 빗줄기 또는 눈물,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같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매기 햄블링의 붓질은 그가 지나온 80년의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예술가로서 매기 햄블링은 외양 너머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그는 고향의 땅과 바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동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회화와 조각으로 소환했다. 매기 햄블링은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가이자 문제적 이단아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찍이 레즈비언임을 밝히며 자유로운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오스카 와일드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같은 위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공예술 작품은 공개될 때마다 찬사와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매기 햄블링은 자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소음에 귀를 기울인 적 없다. “논란을 일으키려고 한 적은 없어요.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지.” 젊을 때부터 그랬듯 올해로 여든 살에 접어든 이 원로 예술가는 오직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고향 서포크(Suffolk)와 런던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책과 옷가지로 어질러진 소파, 제각기 멋대로 자란 식물들, 수도 없이 튀긴 물감으로 지저분해진 벽. 매기 햄블링의 작업실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자유롭고 진실되며,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헛간을 개조한 작업실. 지붕과 창을 통해 충분한 채광이 든다. 천장보다 높이 자란 선인장은 매기가 오랜 친구처럼 여기는 에스메랄다나.
서포크와 런던에 작업실을 두고 있어요. 두 곳에서의 일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1969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런던 몰리 컬리지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정기적으로 런던에 머무는 이유죠. 이곳 서포크 작업실은 강가에 있는 초원의 한적한 시골에 있어요. 일출부터 일몰까지 하루의 흐름을 온전히 느껴요. 생생한 빛의 변화와 새소리 덕분이죠. 런던 같은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곳은 빛을 균질화하고 자연과 단절되니까요. 그래서 서포크를 선호해요. 하지만 어디서든 아침 일찍 일어나 스케치북에 가볍게 잉크 드로잉을 하는 루틴은 같습니다. 밤새 무뎌진 촉각을 회복하고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위한 준비 절차인 셈이죠.
서포크는 당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자 예술 인생의 시작점이죠
고향 땅을 상속받으면서 작업실을 지었어요. 유년시절 서포크에서 학교를 다닐 때부터 제 예술적 정체성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서포크 지역의 예술적 중심지이자 예술학교인 ‘벤턴 엔드(Benton End)’에서 세드릭 모리스(Cedric Morris), 아서 레트-헤인스(Arthur Lett-Haines)와 함께하면서 더욱 발전했죠. 저는 이곳의 땅과 해안가 그리고 하늘과 깊은 연결감을 느낍니다.

작업실 문에 건 영감의 원천들. 아래서부터 마릴린 먼로, 사무엘 베케트, 테니스 선수 앤디 머레이의 사진. 손으로 휘갈겨 쓴 문구 ‘Stiffen the sinews, summon up the blood(힘줄을 굳게 하고, 피를 불러일으켜라)’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 속 대사. 친한 친구가 매기의 작업방식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고 해서 써두었다.
매일 아침 차를 타고 서포크 해변으로 나가 파도를 그리는 습관은 여전한가요
아뇨, 바다는 제 작업에서 중요한 주제지만 더 이상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가진 않아요. 대신 매일 왼손으로 잉크 드로잉을 하며 새로운 감각을 곤두세우곤 합니다. 오른손은 오랜 세월 지나치게 숙련돼 트릭으로 가득 차 있어요. 올해 세인스버리 센터(Sainsbury Centre)에서 바다에 관한 그룹 전시에 설치미술 작품 ‘You are the Sea’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작업실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면
헨리에타 모라에스(Henrietta Moraes)의 사진입니다. 그녀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뮤즈였고, 말년엔 제 연인이자 작품의 주제가 됐습니다. 1999년 헨리에타가 죽고 난 뒤에도 저는 그녀를 그렸어요. ‘머랭을 먹는 헨리에타(Henrietta Eating a Meringue)’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만든 조각이죠. 제 작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 작품이 바다를 주제로 한 작업으로 나를 이끌었거든요. 머랭을 먹는 헨리에타의 입과 입술, 머랭이 녹아내리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해안을 침식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작업실 한쪽에 매기의 조각 작품을 모아둔 곳. 거칠고 불규칙한 표면이 매기 햄블링의 붓 터치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며 다수의 회화와 조각을 남겼습니다. 현재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나요
팔란트 하우스 갤러리(Pallant House Gallery)에서 <나이팅게일 나이트 Nightingale night>라는 개인전이 4월 말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그룹 전시에도 참여할 예정이에요. 앞서 언급한 세인스버리 센터를 비롯해 리버풀에서 열리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전시에도 제 작품이 포함될 예정입니다. 올해는 제가 여든 살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새로운 작품집을 준비 중이에요.
당신은 격렬한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예술가입니다. 관 속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는 오스카 와일드의 조각상이 대표적이죠. 혹자는 작품을 보고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대중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살면서 내가 분류되기를 원한 적 없어요. 나를 지배하는 것은 그 누구도,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작업 주제입니다. 오직 내 삶만이 내가 그리는 것을 결정해요. “비평가들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으면 예술가는 자신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위대한 그림은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의 감정을 동시에 전달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삶의 신비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작업 중인 신작. 타이틀은 미정.
자화상이나 타인의 초상 역시 작품의 오랜 주제였습니다. 물감이 흘러내리거나 튀기는 드리핑 기법과 과감한 붓질로 생생하면서도 왜곡된 표정을 지닌 이미지를 만들었죠
물리적 유사성을 드러내는 덴 관심 없습니다. 예술가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죠. 제게 도전처럼 주어졌던 것은 사람의 내면을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영혼을 담아내는 초상화를 만드는 것 말이에요. 제게 하나의 그림은 하나의 실험입니다.
몇몇 작품은 추모와 애도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연인, 친구와 스승을 그림과 조각으로 몇 번이고 되살려왔어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가는 큰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이는 작업으로도 이어지죠.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내 안에 존재합니다.

작업이 이뤄진 벽. 물감을 흘러내리게 하는 특유의 화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신 역시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죠. 그날 이후 삶과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나요
2022년 뉴욕에서 전시 오프닝을 앞두고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겪었습니다. 뉴욕 병원에서 6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진 후 다시 서포크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작업실에서 여느 때처럼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에너지와 함께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헨리에타를 떠올리며 만든 조각 ‘머랭을 먹는 헨리에타’가 놓인 화단.

책과 옷가지가 어지럽게 놓인 소파, 그 뒤에 놓인 작품은 ‘Lipstick’(2019).
살아 있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합니다. 당신에게 ‘살아 있음’이란
진실을 추구하는 것. 작품 대상이 지닌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언제나 그래왔죠.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 드네요.
21세기 예술가의 역할을 묻는 말에 ‘진실을 추구하는 자’라고 답한 게 생각나네요. 예술을 통해 추구하는 진실에 얼마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제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책상 오른쪽에 놓인 조각은 18세기 영국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동상 초안으로, 파도 위에 서 있는 울스턴크래프트를 나체로 표현해 논란이 일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담배를 든 매기 햄블링.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사진가 OSKAR PROCTOR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민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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