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숍 대표가 끝끝내 곁에 둔 사물들
'보블릭' 대표 박래원이 꼽은 나만의 클래식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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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M 수납장, LC2 체어, 디펜더
가구와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한때는 보기 힘든 디자인이나 소수만 알고 있는 브랜드에 마음이 더 쏠리곤 했다. 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나만의 것을 고르고 싶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는 누구나 알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 중에서도 오랫동안 선택받아 온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온다. 널리 쓰였지만 쉽게 소비되지만은 않은 디자인, 익숙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깊어지는 물건. 이러한 물건들은 ‘디자인 내구성’을 지니고 있다.
물건은 처음엔 시선을 끌고, 그다음엔 자리를 차지한다. 형태가 마음에 들고 공간이 새로워 보이면 자연스레 들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인상은 옅어진다. 그 대신 남는 건 손이 자주 가는지, 계속 곁에 두고 싶은지와 같은 감각이다. 특별한 기능이 없어도 자리를 지키는 물건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이유 없이 익숙해져 있다. ‘USM’은 내게 그런 물건이다. 처음엔 수납장으로 시작했고, 그 다음은 진열장이 되었고, 지금은 아기의 기저귀 갈이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용도와 쓰임은 계속 달라졌다. 그렇지만 본연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나의 일상을 함께하는 중이다. USM은 조립과 분해가 자연스럽고, 주어진 공간이나 상황이 달라져도 그에 맞게 다시 자리를 잡는다. 한동안은 어디서든 흔히 보인다는 이유로 멀리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많이 사용해 봤기 때문에 지금은 더 편하게 느껴지고,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존재가 되었다.
오래 앉아봐야 알 수 있는 의자. ‘LC2’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과 단단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착석감이 인상적이다. 자세를 바꿔도 흐트러짐 없이 받쳐주고, 어떤 공간에 두어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중심 역할을 해낸다. 더 넓고 부드러운 LC3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에겐 LC2가 훨씬 잘 맞는다. 처음과 비교해 보면 이 의자에 익숙해질수록 나와 더 잘 맞는다는 확신이 깊어졌고,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물이 되었다.
각지고 단단한 인상, 투박하지만 매력적인 비율, 전형적인 기계의 외형. 랜드로버의 ‘디펜더’는 처음부터 형태만으로 마음을 끌었던 차다. 그러다 직접 운전해 보니 그 형태가 쓰임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걸 체감했다. 이 자동차에는 전자 장치가 거의 없고, 조작은 직접적이다. 조향은 묵직하지만 단순하고, 운전자의 조율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불편함 점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설득력이 있어 불편함조차 어느샌가 납득하게 된다. 쓰임을 위한 설계가 기능으로 이어지고, 세련되지 않아도 오래 신뢰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 디펜더는 내게 그런 차다.
삶의 흐름에 맞춰 쓰임을 달리하며 오래 곁에 남는 디자인은 대체로 단단하기보다 유연하다. 자주 손이 가며, 함께한 시간이 낯설지 않은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물건을 볼 때 감각이 먼저 반응한다. 손으로 직접 깎은 우드 카빙의 결, 시간이 흐르며 표정이 달라지는 원목의 표면, 온기가 전해지는 패브릭의 촉감. 예전에는 구조나 외형에 더 집중했다면, 이제는 손끝에 남는 감촉이나 오래 쓰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사용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곁에 두고 나와 천천히 닮아갈 물건들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걸 보니 이제 또 다른 나만의 클래식 후보를 찾아 나설 때인지도 모른다.
박래원
‘보블릭’을 운영하며, 가구(家具)보다 가구(家口)를 더 우선하며 살아가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글 박래원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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