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유리 공예 작품 같은 조명의 비결

예측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조명 브랜드 보치.

프로필 by 권아름 2025.10.23
보치의 창립자 오메르 아르벨의 초상.

보치의 창립자 오메르 아르벨의 초상.

BOCCI

예측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실험으로 포착하는 조명 브랜드 보치. 유리의 물성과 우연성을 탐구해 온 그들의 작업 뒤엔 재료와 빛 사이의 긴장을 끊임없이 실험해 온 오메르 아르벨의 집요한 태도가 있다.


초기작 ‘14’를 피라미드 형태로 변형한 ’14 피라미드’.

초기작 ‘14’를 피라미드 형태로 변형한 ’14 피라미드’.


천장엔 양날개처럼 펼쳐진 ‘141’이 매달려 있다.

천장엔 양날개처럼 펼쳐진 ‘141’이 매달려 있다.


보치의 시작은 재료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고

처음부터 조명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오히려 재료가 익숙지 않은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에 흥미를 느꼈다. 그런 호기심이 유리로 향했고, 유리의 물성을 빛으로 드러내는 실험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조명 작업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첫 번째 작품인 ‘14’도 그런 흐름에서 탄생했다. 전통적 의미에서 조명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유리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고유한 성질을 발견했고, 그 결과 공기처럼 가볍고 아름다운 오브제가 탄생했다. 그때 조명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재료 실험의 결과를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탄생한 ‘14’에는 어떤 실험의 흔적이 남아 있나

‘14’는 컬럼비아 시골의 개조된 헛간에서 시작됐다. 반구형 몰드에 유리를 붓는 주조 실험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기포와 왜곡이 발생했다. 온도와 몰드의 재질, 냉각 시간 등 다양한 변수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유리가 깨지거나 비정상적으로 굳는 등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결국 불규칙성이야말로 ‘14’의 본질이 됐다. 완성된 유리에서 나오는 빛은 마치 물속을 통과하는 듯 부드럽고 감성적이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과정’ 자체가 형태와 감성을 정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 통찰은 지금도 작업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형태를 디자인하기보다 ‘과정’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과정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

도구와 재료, 조건을 설정한 후 한 걸음 물러서서 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형태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둔다. 이 과정은 마치 재료와 협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고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다. 어떤 형태가 나오든 받아들인다. 기이하거나 못생겨 보여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우리 스튜디오는 미의 기준을 고정하지 않으며, 자식처럼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과정은 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두 개의 유리 반구 형태를 유리에 붙여 제작한 ‘14p’ 조명

두 개의 유리 반구 형태를 유리에 붙여 제작한 ‘14p’ 조명


20주년을 기념하며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보치의 전시 풍경.

20주년을 기념하며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보치의 전시 풍경.


어느 인터뷰에서 “불편함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말한 적 있다. 이 역시 실험 과정과 연결되는 이야기인지

녹은 유리를 접거나, 말랑한 틀 위에 콘크리트를 붓거나, 전기나 압력을 가하는 등 재료를 극한 조건에 놓을 때 예기치 않은 무언가가 나타난다. 중요한 건 질서가 무너지는 그 순간이다. 그 변형의 찰나를 포착하고 고정시키면 독특한 형태가 드러난다. 내게 불편함은 가능성을 여는 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조명들은 흥미롭게도 모두 숫자로 이름 붙여져 있다. 그 방식엔 어떤 기준이 있는 걸까

처음에는 단순히 관리 목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는 아이디어의 흐름과 진화를 보여주는 방식이자 일종의 ‘챕터’가 됐다. 장르 구분도, 위계도 없다. 시간 흐름을 반영하긴 하지만 그다지 엄밀하지 않다. 덕분에 모든 작업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어떤 아이디어가 훗날 또 어떤 작업으로 나타날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숫자는 우리 작업의 맥락을 연결해 주는 언어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초기와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초창기에는 시장 반응을 의식했지만, 지금은 훨씬 자유롭고 본능적으로 작업한다. 상업적으로 다소 위험하더라도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싶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고, 사람들도 그 점을 알아본 것 같다. 여전히 중심에는 과정이 곧 결과이며, 재료와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핵심 철학이 있다. 그 철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조명뿐 아니라 건축, 출판 등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보치는 어떤 브랜드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나에게 건축과 디자인, 공예, 과학 등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분야가 아니다. 모두 ‘탐구’라는 동일한 충동에서 비롯된 표현 방식일 뿐이다. 건축에서 배운 주조 기술이 조명 기법에 영향을 주듯 다양한 프로젝트가 서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때 예기치 못한 시너지가 생긴다. 내 스튜디오는 명확히 분류되는 조직이라기보다 협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실험실 혹은 아틀리에에 가깝다.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이지현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COURTESY OF BOC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