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퐁피두센터 대규모 기획전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작가가 있다
한국적 색채 추상의 선구자 최욱경은 루이스 부르주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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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파리 퐁피두센터 대규모 기획전 <Women in Abstraction>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 일레인 드 쿠닝, 루이즈 부르주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을 알면 최욱경(1945~1980년)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5피트 2인치(158.2cm)의 작은 키, 43kg의 체중으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500호짜리 대작을 그리고 있는 최욱경을 보면 ‘화산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 든다.” 마흔다섯 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최욱경을 만난 시인 김영태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최욱경의 ‘Untitled’(연도 미상).
스스로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된 활화산 같았던 한국적 색채 추상의 선구자. 그가 화실 삼아 홀로 지내던 여의도 45평 아파트 한편엔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자극적인 타이틀 이면엔 그가 20여 년 동안 남긴 1000여 점의 작품이 있다. 하지만 재능에 비해 명성은 미미했고, 무엇보다 외로운 싸움을 견뎌야 했다. 작가로서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은 이방인으로 살았다.
일찍이 미술에 재능을 보인 최욱경은 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대 미대라는 소위 엘리트 코스를 거쳐 스물셋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서양화를 공부하며 조각과 콜라주 등 다양한 매체를 익히고,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하지만 1960년대 서양에서 ‘동양인 여자’로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한계는 얼마나 두터웠을까. 1969년 최욱경이 미국 체류 중에 완성한 ‘무제’에는 어둠 속에서 태아가 웅크린 듯한 형상 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When the time comes/Will the sun rise/Willow tree showing/Will the time ever come to me?(때가 되면/해가 뜰까/버드나무가 보일까/과연 내게 때가 오긴 할까)”

1973년 작업실에서 최욱경.

‘열리기 시작’(1978).
9년 만에 돌아온 한국도 그를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나의 색조로 화면 전체를 덮는 단색화가 대세인 시절, 거칠고 자유분방한 붓질과 강렬한 색감은 ‘미국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한 그림’ 정도로 평가받을 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대 그림을 직업으로 삼은 여자에게 으레 따라붙는 ‘여류 화가’ 또는 ‘규수 화가’라는 타이틀에 부응하는 얌전한 성정도 아니었던 탓일까. 최욱경은 2년 만에 다시 미국행을 택하고 캐나다, 노르웨이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이며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특유의 색채 감각과 새, 꽃, 물고기 등의 자연 요소를 결합해 추상표현주의와 인상주의를 섞은 작품을 선보였는데, 바로 폭 2.66m, 길이 1.47m에 달하는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다. “내 그림 속에서, 음악이 갖고 있는 추상성에 달할 수 있는 요소는 색상이다. 단지 색상들의 현란한 아름다움에 심취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체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 때문이다. 즉 그림에서 색상은 조형적인 것과 심리적 기능을 동시에 병행하기 때문이다. 색채는 그 자체가 빛이고, 자연 속에서 빛은 색상을 만들어내며, 그림 속의 색채는 빛을 발산한다. 각 색상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빛을 투사하고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최욱경은 1979년부터 다시 한국에 머물며 단청과 민화 등 한국의 전통 색채를 연구하고, 국내 여러 곳을 여행하며 한국의 자연을 영감 삼아 회화적 실험을 이어 나갔다. 추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까.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
최욱경은 언어를 함축하는 데도 능했다. 작업하며 틈틈이 남긴 시를 모아 1965년 영문 시집 <Small Stones>, 1971년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출간했다. “수천 개의 하늘 문들이 활짝 열렸고/태양이 백색으로 찬란한데/쏟아지는 광채가 나를 장님으로 만듭니다.” 최욱경의 시 ‘앨리스의 고양이’ 전문. 생전에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했다는 점에서 동화 속 앨리스와 체셔 캣이 나눈 대화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앨리스가 묻자 고양이는 답했다.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따라 달렸지.”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도달한 찬란한 세계. 최욱경의 눈에 비쳤을 빛과 그 속에 담긴 수만 가지 색을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려 본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THE ARTIST·MMCA(국립현대미술관)
- COURTESY OF KUKJE GALLERY·GALLERY HYUN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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