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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의 시대다. 매주 쏟아지는 SPA 브랜드의 신제품, 알고리즘이 기계적으로 추천하는 트렌드, 손가락 하나로 끝나는 결제 시스템까지. 트렌드는 빛의 속도로 소모되고, 그렇게 소비된 옷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세대의 옷장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트렌드에 합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맥시멀리즘의 범람 속에서 영리하고 정제된 선택을 행한다. 수많은 선택지를 거르고 걸러 자신에게 부합하는 조각만 남기는 편집 과정 말이다.
요즘 세대의 패션은 구매가 아닌 큐레이션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이런 흐름의 기저에는 구체적이고 치밀한 쇼핑법이 자리한다. 젠지 세대에게 쇼핑은 백화점을 배회하거나 플랫폼의 실시간 랭킹 순위를 답습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편집 숍의 바잉 머천다이저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저장 폴더와 핀터레스트 보드, 남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아카이브 계정을 샅샅이 추적하며 자신의 취향을 ‘디깅(Digging)’한다. 대량생산된 물건을 소비하는 대신 세컨드핸드 패션 플랫폼인 후루츠패밀리(Fruitsfamily)나 폴 하든, 구이디와 같은 아티잔 브랜드 기반의 편집 숍을 기민하게 넘나들며 숨은 아카이브 피스를 발굴한다.
사실 이런 편집증적 디깅은 해외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돼 왔다. 아카이브의 성격도 더 아방가르드하게 전개되는데, 상징적인 예는 글로벌 패션 키드들의 거대한 아카이브 성지로 자리 잡은 콘스탄트 프랙티스(Constant Practice)다. 설립자 지크 헤미(Zeke Hemme)는 1990년대 이세이 미야케의 기능주의 재킷이나 만다리나 덕의 초창기 테크니컬 웨어 같은 희귀 아카이브 피스를 집요하게 좇는다.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빈티지 아카이브 숍 ‘로그(Rogue)’를 운영하며 젠지 문화의 아이콘이 된 에마 로그(Emma Rogue)나 브이로그 유튜버로 시작해 글로벌 스타의 자리까지 올라간 엠마 체임벌린(Emma Chamberlain)도 마찬가지다. 기성 브랜드가 짜놓은 소비 트랙에서 벗어나 과거의 유산과 서브컬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편집하며 자신만의 옷장을 채우는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요즘 세대의 편집증적 안목이 단순히 개인 옷장에만 머물지 않고 거대 메이저 브랜드의 문법까지 바꿔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꽁꽁 숨어 있던 아카이브 피스를 발굴하는 동시에 동시대 가장 뜨거운 언더그라운드 하이엔드 레이블을 레이더망에 올려두고 교차 편집한다.
이를테면 앙팡 리셰 데프리메(Enfants Riches De´prime´s)의 펑크 룩이나 오토링거(Ottolinger), 키코 코스타디노브(Kiko Kostadinov) 등의 서브컬처 아이템이 이들의 옷장에서 수십 년 된 빈티지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2000년생 디자이너 루이스 도벨가르텐이 이끄는 독일 쾰른 기반의 노/페이스 스튜디오(No/Faith Studios)는 기성 패션계의 문법을 거침없이 비껴간 브랜드다. 정식 패션 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SNS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성 드롭(Drop) 방식을 통해 거칠고 파괴적인 피스들을 선보이며 전 세계 젠지 패션 키드 사이에서 종교적 팬덤을 구축했다. 최근 스포츠 브랜드 푸마가 이 언더그라운드의 아이콘과 손잡고 벌인 파트너십은 젠지식 편집 문화가 메이저 시장을 어떻게 점령했는지를 증명해 준다. 노/페이스 스튜디오는 최신 유행을 새로 찍어내는 대신, 푸마의 아카이브에 잠들어 있던 2004년 작 ‘탈론’과 2005년 작 ‘베이서’ 스니커즈를 직접 디깅해 수면 위로 끌어올려 새롭게 완성했다.
과거의 유산 위에 날 선 레이블의 정체성을 거침없이 뒤섞는 안목, 이것이 지금 젠지식 큐레이션의 문법이다. 어떤 로고를 입고 들었느냐를 겨루는 유치한 시대는 끝났다. 전혀 다른 옷을 조합해 고유의 무드를 만들어내는 영리한 안목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됐다. 지금 젠지의 패션 중심은 나만의 아카이빙을 만들어가는 것은 물론, 내 삶을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와 맞닿아 있다. 맹목적인 유행에 매몰돼 있다면 이제는 나만의 아카이브 보드를 직접 편집할 시간이다. 그것도 요즘 세대가 보여주는 방식처럼 대단히 명민하고도 집요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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