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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자비 없이 내달리는 나홍진의 피 칠갑 SF 어트랙션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156분, 관객까지 두들겨 패는 육중한 액션에 그저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영화 '호프'.

프로필 by 라효진 2026.07.07

우뚝 솟은 건물 하나 없이 펼쳐진 평야 한 가운데 큰 물체가 버려져 있습니다. 가까이서 들여다 보니 이미 뻣뻣하게 굳은 소의 사체입니다. 들짐승들의 사냥감이 됐나 했더니 먹힌 흔적은 없습니다. 그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깊고 큰 발톱 자국 뿐이었죠. 마을 청년들은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지만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소리입니다. 호랑이가 어찌저찌 땅끝 마을의 산까지 내려왔다고 가정한들, 아직 지뢰 제거도 덜 끝난 비무장지대 항구 마을에선 소를 해치기 전에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요. 동물을 죽여 길 한복판에 전시하듯 버렸을 리도 만무하고요. 하지만 소를 할퀸 발톱 자국의 주인공이 될 만한 생명체는 마을 사람들이 아는 범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호프>는 이 이해하기 힘든 사건에 맞닥뜨린 호포항의 하루를 그립니다.


영화 <호프>

영화 <호프>


출현한 것이 호랑이가 맞다면, 총을 든 사람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모두가 공유할 거예요. 문제는 호랑이가 아닐 경우입니다. 마을 전체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갈갈이 찢긴 시체와 부서진 건물로 스스로를 내보입니다. 그 실체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증언을 해 줄 수도 없어요. 여럿이서 화력 센 총을 난사하고 유탄까지 쏴도 죽기는 커녕 자동차를 집어 던져 사람을 으깨 죽입니다. 벼랑 끝에 몰린 마을 사람들의 원초적 공포는 점점 커집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한다'는 믿음은 대책을 궁리할 겨를마저 제거해 버리죠. 의문의 존재와 싸움이 계속될수록 호포항 사람들은 아무도 조심하지 않아요.


영화 <호프>

영화 <호프>


오랜 피말림 끝에, 관객은 범석(황정민)의 눈으로 마을을 초토화한 존재가 외계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가 생기진 않습니다. 외계인이 호포항을 아비규환으로 만든 원인은 둘째치고 상황을 나아지게 할 방법도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재앙 속에서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무식한 총질일지라도 모든 움직임에서 생존을 향한 갈망을 뿜어내죠. 그리고 그건 외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체념이 마땅한 상황에서 체념하지 않습니다. 같은 것을 원하는 인간과 외계인의 사투는 156분의 러닝 타임을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휘몰아칩니다.


영화 <호프>

영화 <호프>


영화는 나홍진 감독이 만든 지난 세 작품의 미덕들을 SF 장르에 녹여냅니다. <추격자>의 시큼한 땀과 헐떡이는 숨, <황해>의 두드려 패고 으깨는 원시적 액션, <곡성>의 근원적 공포가 <호프>에 다 있습니다.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총기와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르는 총탄으로 외계인을 상대하는 극 중 인간들의 액션도 볼거리지만, 쾌감을 주는 건 지구의 생물들을 압도적 힘으로 뭉개버리는 외계인의 공격입니다. 지나간 자리에 온전한 것을 남겨두지 않는 외계인들의 육중한 타격은 오로지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스릴을 선사하죠. 외계인의 외형이 새롭지 않다는 인상은 오히려 신선함에 대한 강박이었던 것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영화 <호프>

영화 <호프>


침엽수림에서 펼쳐지는 성기(조인성)의 마상 액션은 한국 영화사에 기록될 명장면을 만들었습니다. 빽빽한 숲 속 울퉁불퉁한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만 봐도 조마조마한데, 달리는 말 위에서 허리를 비틀어가며 총을 쏩니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속 말 탄 정우성의 임팩트를 능가하는 경이로운 액션입니다. 범석이 이끄는 맨몸 달리기 도주와 성애(정호연)이 주도하는 수동 기어 카체이싱 역시 극한의 긴박감과 박진감으로 보는 이의 몰입을 이끕니다. 대사보다 감탄사가 더 많이 들리는 영화에서 액션의 힘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진풍경을 <호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죠. 거기다 한시도 여유 찾을 틈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허를 찌르는 유머에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의 감각을 가만히 두지 않는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그날 밤은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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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