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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출신의 아티스트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는 현실을 살짝 비틀어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작가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얕은 수면 아래 서 있는 ‘수영장(Swimming Pool)’, 건물 외벽을 기어오르는 듯한 착시를 만들어내는 ‘건물(Btiment)’ 시리즈는 동시대 미술의 아이콘이 됐다. 거울과 원근법, 공간 구조를 활용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시각적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치에 가깝다.
그의 세계를 집약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쿄, 마이애미, 밀란, 헬싱키를 거쳐 마침내 파리 그랑 팔레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 개막일, 파리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를 오가며 살아가는 레안드로 에를리치를 만났다. 그는 이 도시들을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끊임없이 단련시키는 장소라고 했다. “파리와 나 사이엔 긴 역사가 있어서 이번 전시가 꽤 각별합니다. 지난 30년의 작업을 이 도시에서, 그것도 그랑 팔레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선보인다는 건 아티스트에겐 영광이죠.”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대표작 ‘건물’. 오스만 양식의 건물 파사드를 바닥에 눕히고 거울로 반사시켜, 관람자가 건물 외벽을 자유롭게 기어오르는 듯한 착시를 만들어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뒤흔드는 에를리치의 대표작으로 전시는 9월 6일까지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다. © LEANDRO ERLICH STUDIO
그가 반복적으로 소환하는 무대는 흥미롭게도 교실, 창문, 계단, 엘리베이터, 수영장처럼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간이다. 에를리치는 평범한 장소를 낯설게 변형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현실의 규칙을 흔든다. 익숙했던 풍경은 어느 순간 환상이 되고, 관람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매번 도시의 건축적 정체성을 파사드에 담아왔어요. 어떤 의미에서 제 작품은 익명의 만남이 아니라 도시와의 대화라고 생각해요.”
대표적인 예가 ‘건물’이다. 2004년 파리의 야간 예술 축제 ‘뉘 블랑슈(Nuit Blanche)’를 위해 처음 제작한 이 작품은 파리를 상징하는 오스만 양식의 건물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건물 외벽을 실제 크기로 바닥에 눕혀 놓고 그 위에 45° 각도의 거대한 거울을 설치했다. 관람자는 바닥에 놓인 외벽 위를 걷거나 창틀에 매달릴 뿐이지만, 거울 속에서는 건물 벽을 오르거나 추락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에를리치는 건축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대신 중력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그의 작업에서 관람자 역시 수동적 감상자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 파사드 위에 올라서는 순간, 그 작품은 그 사람과 함께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새로운 작품이 된다.” 그에게 설치미술 작업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장면이다. “나는 항상 관람자를 작품 안으로 초대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설치미술 작품에서는 특히 그래요. 그게 작품을 살아 있게 만들거든요.”
창문너머로 푸르른 정원을 바라보면 반대쪽에 선 또 다를 나를 발견한다. 거울이 빚은 환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표현한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 Didier Ploie
최근 그의 관심은 기후 위기와 도시 환경, 사회적 불안 같은 동시대 이슈로 확장되고 있다. 물에 잠긴 도시를 연상시키는 설치미술 작품이나 황량한 풍경 속에 버려진 건축물을 다룬 작품은 현실과 상상을 오가면서 결국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세계를 비추는 은유로 작동한다.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우연이 아니다. 아버지와 형제, 이모까지 건축가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건축을 가까이하며 성장했다. 모두 그가 건축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가 건축에서 발견한 것은 구조나 기능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건축 안에서 살아가니까요.” 그에게 건축은 공간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언어로 봤다.
세 도시를 오가며 살아가는 삶 역시 그의 시선에 영향을 미쳤다. “이동하며 사는 삶은 일상을 더 의식적으로 만들어요. 한 도시에 쭉 살면 내가 슈퍼마켓에 간 게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모를 때가 있잖아요. 익숙함이 그렇게 만드는 거죠. 하지만 월요일에 도쿄에 있고 수요일에 파리에 있다면, 매일이 각인됩니다. 끊임없는 대비 속에 있게 되고,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죠.” 이번 그랑 팔레 전시에는 총 14점의 설치미술 작품이 소개된다. 어둠속의 수면 위에 작은 배들이 떠 있는 듯한 ‘반사의 항구(Port of Reflections)’로 시작해, 방향 감각을 교란시키는 ‘엘리베이터 미로(Elevator Maze)’와 정체성과 시선의 문제를 다룬 ‘탈의실(Changing Rooms)’을 거쳐, 마지막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재구성한 ‘건물’이 관람자를 다시 파리의 풍경으로 이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피팅룸'을 작가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곳으로 만들었다. © Didier Ploie
신작 음향 설치미술 작품 ‘계단실(cage d’Escalier)’도 눈여겨볼 만하다. 관람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보이지 않는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와 생활 소리를 듣게 된다. 누군가의 집, 이웃의 하루, 익명의 삶이 겹쳐지며 평범한 계단은 하나의 서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전시장 곳곳에는 에를리치 특유의 유머도 숨어 있다. 타고 올라가도 결국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계단, 거울 앞에서도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피팅 룸까지. 익숙한 공간은 그의 손을 거쳐 낯설고 기묘한 질문으로 바뀐다. “유머는 내 작업의 전략은 아니에요. 내 성격의 일부로 볼 수 있죠. 나는 본질적으로 유머가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현실과 환상, 믿음과 착시의 경계를 유쾌하게 뒤흔드는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세계. 그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늘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 풍경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이 전시는 현실을 벗어나는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가 30년 동안 이어온 집요한 질문일 수도 있다. 과연 현실은 우리가 믿는 만큼 단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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