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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어느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스튜디오. 막 무대인사를 끝마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브로커> 등 한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거장의 서울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참석과 영화 <룩백> 홍보를 겸해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이다.
그 곁에는 감독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공기를 빛내는’ 존재가 있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 이어 두 번째로 그의 작품에 함께한 배우 데구치 나츠키다. 그의 말대로 그가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인사 하며 들어서자, 일순간 공기가 환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감독은 특유의 조용하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거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젊은 배우다. 두 사람이 나란히 <엘르> 카메라 앞에 선 모습에는 어떤 위계나 무게보다 자연스러운 유연함이 있었다.
<룩백>은 <체인소 맨>의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그리는 두 소녀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재능이 다른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도, 제자리에 멈춰 서게도 한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데구치 나츠키가 이 이야기를 만난 시점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왔고, 다른 한 사람은 연기의 즐거움을 이제 막 배우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니 두 사람은 같은 작품을 두고 서로 다른 질문을 품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시작하게 했는가. 무엇이 그만두지 않게 했는가. 그 사이에서 우리는 누구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가… 서울의 어느 한낮, 두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물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번 한국 방문은 어땠습니까? 서울은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른가요
이번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참석과 영화 홍보를 겸하다 보니 전보다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덕분에 먹고 싶은 음식도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날 수 있었어요. 아주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룩백>은 학교 신문에서 네 컷 만화를 그리는 자신만만한 소녀 후지노와 그를 동경하지만 세상 밖이 두려워 방 안에 틀어박힌 쿄모토가 함께 성장하고 헤어짐까지 겪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님이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동시에 의외였고요
처음 이 만화를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코로나19로 준비하던 기획들이 모두 멈췄던 시점에서 이 작품을 만났어요. 큰 격려를 받은 기분이었죠. 다시 한 번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의욕에 불을 지폈거든요. 처음에는 실사영화로 만들 생각과는 별개로 주변 사람에게 대단한 만화가 있다며 열심히 권하고 다녔습니다. 그게 저와 <룩백>의 첫걸음이었어요. 이후 원작자인 후지모토 타츠키를 만날 기회가 생겼고, 제가 그 작품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프로듀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영화감독인데, 원작자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지금 이 마음을 어떤 형태로 남긴다면 그건 영화여야 하지 않을까? 그때 처음으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극중 인물에게 등 떠밀리는 기분이었다지요. 영화를 완성한 지금, 당시 품었던 창작에 관한 질문에 답을 갖게 됐나요
원작을 관통하는 질문은 결국 ‘인간은 왜 무엇을 만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후지노에게는 ‘나는 왜 만화를 그리는가?’라는 질문이었겠죠. 원작에는 절망적인 독백이 등장해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데, 나는 대체 왜 만화를 그리고 있는 걸까?’ 아무리 만화를 그려도 세상에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갈 것인가? 저는 이 질문을 실사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 모든 회의와 절망을 안고서도 다시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하는 후지노의 모습이 저와 겹쳐 보였거든요. 돌이켜보면 저 역시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고, 그 뒷모습을 좇으며 창작을 계속해 왔어요. 영화를 만든 지 어느덧 30년이 됐는데, 제가 등을 바라보던 선배들 가운데 절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제 작품을 지켜보고 응원했던 분들, 배우와 프로듀서, 부모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다 보니 이제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를 향해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 안에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그분들이 이 세상에 없다고 해서 원동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더군요. 오히려 이제 그들이 제 등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후지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쿄모토가 여전히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낄 거예요. 그래서 더 어깨를 펴고,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마음먹는 거죠.
후지노와 쿄모토는 너무 다르지만 서로를 만나 변화하는 소녀들이죠. 이들을 연기할 네 명의 배우를 캐스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음양의 균형입니다. 원작에서도 후시노는 양, 쿄모토는 음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한 사람은 밝고 또 한 사람은 어둡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나란히 있을 때 만들어지는 균형이 중요했죠. 해와 달이라고 할 수도,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외모가 닮았는지보다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두 배우와 성장한 시절을 연기하는 두 배우 사이에 동일한 음양의 균형이 느껴지기를 바랐습니다.
데구치 나츠키와는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 이어 다시 만났습니다. 밝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에너지부터 자존심과 열등감까지, 다채로움이 공존하는 후지노에게서 데구치를 떠올린 이유가 있나요
오늘도 느끼셨겠지만, 등장하는 순간 주변이 환해지지 않습니까(웃음). 후지노도 만화를 그린다고 해서 내향적이거나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오히려 주변에서 운동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겠느냐고 말할 정도로 교실안에서도 굉장히 인상적인 존재죠. 그런 아우라는 연기나 연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타고난 기질에 가까워요. 데구치 나츠키가 가진 천성과 천진난만함을 작품에 담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배우에게 계속 얘기했던 건 후지노는 자존감이 높고 천진난만하지만, 쿄모토를 향한 일종의 콤플렉스도 품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그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미묘한 열등감이 존재합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이 데구치가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복잡한 마음을 잘 표현해 주기를 바랐고, 이번 영화에서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룩백>에서는 대사보다 두 사람이 함께 걷고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간이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우정을 말로 설명하기보다 프레임 너머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신경 쓴 점이 있나요
예를 들어 같은 방 안에 있을 때, 한 명은 등을 보이고 한 명은 빛을 보면서 만화를 그리고 있잖아요. 두 사람이 만화를 그리는 ‘두 소리’를 내면서 사각사각, 같은 공간에서 그 소리들이 함께 울리는 것으로 관계의 공감 또는 공명, 감정 공유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같은 소리를 보고 듣는 상황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나 시선, 두 사람의 감정 상태로 보는 거죠.
후지노와 쿄모토는 서로 좋아하지만, 동시에 서로의 재능에 상처받고 질투하고 좌절합니다. 어쩌면 창작자 사이에서만 가능한 우정이기도 한데요. 감독님께도 그런 존재가 있었나요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는 있었을 거예요. 중학교 시절 친구라든지요(웃음). 그런데 원작자인 후지모토 타츠키의 경우에는 ‘후지모토’라는 이름에서 ‘후지’와 ‘모토’를 나눠 두 인물의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두 사람에게 나눠 담은 셈인데, 저도 창작할 때면 제 안에 후지노와 쿄모토가 모두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제 안에도 분명 그 두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감독님에게 ‘룩 백(Look Back)’, 즉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요
제목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난 인생을 돌아본다는 뜻도 있고, 실제로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본다는 의미도 있죠. 원작은 이런 의미를 다양한 장면에 겹쳐놓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영화에서도 반드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마지막에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결과적으로 제목은 ‘룩백’이지만 앞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후지노의 마지막 선택으로 제목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히는 거죠. 등은 뒤를 향한 등이 아닌, 앞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의 뒷모습이죠. 제게도 ‘룩백’은 그런 의미예요.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아이와 청춘의 얼굴이 언제나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룩백>의 두 소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어요.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며 성장하죠. 이번 영화를 만들며 새롭게 발견한 젊음의 얼굴이 있나요
이 작품을 찍으면서 무언가에 푹 빠져 열중하는 아이의 등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꼈습니다. 사실 그런 모습은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어른이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잖아요. 어떤 이해타산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몰두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 모습과 마주할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다면 사람을 이토록 오랫동안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좋아하는 마음, 잘하고 싶은 욕심,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까지. 감독님을 지금까지 가장 오래 움직여온 것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 안에서 창작 욕구가 줄어든다면, 그때 비로소 무엇이 저를 움직여왔는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서울 어딘가에도 존재할 후지노와 쿄모토에게 한 마디 전한다면
이 영화에는 무척 소중하고 귀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 인생의 일부분이죠. 그 시간에만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순간이기에 가능했던 것들…. 인생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잖아요. <룩백>에는 그런 찰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꼭 슬픈 장면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데구치 나츠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어요. 두 사람이 나란히 피사체가 된 기분은 어땠나요? 이번 작품을 통해 서울과 부산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냈죠
하하. 감독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건 쉽지 않네요. 카메라를 통해 마주하는 게 아니라 함께 서려니 조금 어색했어요(웃음). 한국에는 개인적으로 휴가를 보내러 종종 오는 편인데요. 음식이 맛있어서, 늘 먹으러 오는 것 같기도 해요.
<룩백>에는 후지노와 쿄모토가 여러 계절을 지나며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촬영 역시 아키타에서 사계절을 보내듯 이어졌다고요. 그곳에서 보낸 시간 중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하루가 있나요
먼저 크랭크인하던 날이 떠올라요. 눈이 많이 내렸거든요. 후지노와 쿄모토가 편의점에 무언가를 사러 함께 가는 장면을 찍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감독님에게 <룩백>의 후지노를 연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요? 원작과 대본을 읽으며 꼭 해보고 싶다는 순간이 있었나요
감독님께서 후지노 직접 제안해주셨어요. 후지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심히 몰두하는 인물이잖아요. 저는 그런 면이 별로 없거든요. 저에게 없는 모습을 가진 인물이라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방금 데구치가 등장하는 순간, 주변이 환해진다고 증언했어요(웃음). 후지노의 밝고 천진난만한 에너지를 데구치만이 표현할 수 있다고요
밝은 에너지라는 점에는 공감해요. 저도 밝은 성격이니까요. 하지만 좋아하는 무언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고, 어떻게든 해내려는 끈기는 후지노가 저보다 강한 것 같아요. 저는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거든요(웃음).
처음 원작과 대본을 읽었을 때 <룩백>은 어떤 이야기로 다가왔나요? 두 소녀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나요, 아니면 무언가를 좋아하고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나요? 촬영을 마친 지금은 그때와 조금 다르게 보이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촬영 전 원작과 대본을 읽었을 때는 두 소녀가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키타에서 실제로 촬영하고, 인물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죠. 결국 이 영화는 두 소녀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라는 걸 느꼈어요. 촬영을 거듭할수록 인물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됐고요. 지금 제게 <룩백>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라면 ‘성장’이라 말하고 싶어요.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 이후 다시 감독님과 만났습니다. 당시 연기에 자신이 없던 데구치에게 감독님은 ‘조금 더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사람이었죠. 약 4년 만에 다시 감독님의 카메라 앞에 선 자신에게서 달라진 점을 발견했나요
그때는 연기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신감도 부족했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있는 그대로 제 모습으로 연기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연기하는 일이 재미있어졌어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저도 많이 성장한 것 같습니다.
후지노는 꽤 재미있는 아이예요. 자신감이 넘치고 인정받는 걸 좋아하면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흔들리죠. 원작을 통해 이미 많은 독자가 자신만의 후지노를 마음속에 그려뒀을 텐데요. 자신만의 후지노를 찾기 위해 고민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후지노는 생각보다 복잡한 인물이에요. 겉으로 드러내는 표정이나 말이 실제 마음속 생각과 다를 때가 많거든요.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는 게 어려웠어요. 촬영 전에는 만화를 그리는 연습도 했고요. 현장에서는 쿄모토 역의 마키타 아쥬와 호흡을 맞춰가며 후지노라는 인물을 조금씩 만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제가 느끼는 감정에 관해서도 함께 이야기했고요.
후지노에게 그림은 단순한 취미라기보다 삶의 방식에 가깝습니다. 촬영을 위해 직접 그림을 그리고 펜을 움직이는 연습도 했을 텐데요. 그렇게 직접 ‘그리는 사람’의 시간을 보내며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었나요
제가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죠(웃음)! 그림 연습은 잘 그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만화를 그릴 때 나는 소리나 펜을 움직이는 자세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한 연습이었어요. 직접 해보니까 만화의 한 칸 한 칸을 완성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새삼 느꼈어요.
좋아하던 일도 어느 순간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괴로울 때가 있잖아요. 데구치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 ‘좋아한다’와 ‘잘하고 싶다’ 사이에서 마음이 복잡해진 적이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는 편은 아니에요. 춤이나 다른 특별한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후지노처럼 무언가에 온전히 빠져드는 경험은 제게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웃음).
데구치에게도 오랜만에 만나면 곧바로 그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친구가 있나요
저에게도 후지노와 쿄모토 같은 관계의 친구가 있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부터 계속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죠.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는 건 아니에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만나거든요(웃음). 정말 가까운 친구들이라 만나면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을 알 수 있어요.
어린 후지노를 연기한 나나세 후우리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어땠나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인물로 이어진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도 있었나요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나나세 후우리가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어요. 다만 아역배우들의 오디션 현장에 저도 있었는데 당시 저도, 그 친구도 머리가 길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나나세를 보고 저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거예요. 저도 그 모습을 보고 ‘아마 이 친구가 후지노를 연기하겠구나’ 싶었죠. 완성된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연기하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거든요. 둘 다 머리가 길었는데, 머리를 단발로 자른 뒤에도 분위기가 엄청 비슷한 거예요! 영화 속 뒷모습만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한번은 감독님께 스틸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저예요?”라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웃음).
<룩백>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크랭크인하는 게 무서웠다”고 했어요. 그토록 두려웠던 작품을 무사히 마친 지금, 당시의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사실 원작의 인기가 워낙 높고 이미 애니메이션영화도 있었기 때문에 부담이 컸어요. 대본을 읽어도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죠. 불안한 마음을 감독님께 말씀드렸는데, 그때 감독님께서 “데구치가 생각하는, 데구치만의 후지노를 찍을 거야”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믿고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데구치의 얼굴을 자주 보게 됐어요. 새로운 작품과 인물을 계속 만나며 연기를 이어가는 지금,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인가요
지금은 제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하나 잘해내는 게 목표예요.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다고들 말하잖아요. 저 역시 지금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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