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Willing To Be Vulnerable ? Velvet #15)〉 세부
올해 상반기에 열린 몇몇 전시를 통해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공고한 명성을 지닌 이불이란 아티스트에 대해 새삼 감탄했던 사적인 순간들.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불-시작〉 전이 그 시작이었다. 이불의 초기 활동이 있었던 1987년부터 10년 동안 발표돼 미술계의 전설로 남은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고 드로잉, 작업 지시서, 기록 사진과 영상 등을 꼼꼼하게 더한 코멘터리 같은 전시였다. 1989년 대학로 동숭아트홀에서 막대사탕을 물고 거꾸로 천장에 매달렸던 〈낙태〉 등 퍼포먼스 기록 영상 12편이 상영되는 전시실에서 ‘페미니즘 전사’ 시절 이불의 서슬 퍼런 급진성과 전위성을 목도하는 일은 이불의 작품 세계는 물론 한국 현대 미술의 흐름과 시대상까지 한 번에 직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1990, 12일간의 퍼포먼스, 《제2회 한·일 행위예술제》, 김포공항, 한국; 나리타공항, 메이지 신궁, 하라주쿠, 오테마치역, 코간 절, 아사쿠사, 시부야, 도쿄대학교, 도키와자 극장, 도쿄, 일본. 작가 제공
비슷한 시기에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술 소장품 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은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과 좌절의 양면성을 담아내는 이불의 대표작 〈사이보그〉 시리즈, 그처럼 찬란한 빛을 발산하지만 신체의 일부가 잘린 듯한 〈크러쉬〉 등이 천장에 매달린 채 한 자리에 모여 숨을 멎게 했다. 냉소적인 아름다움이 멜랑콜리로 전환되는 화이트 큐브 안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휴대폰을 드는 것도 잊는 듯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현대미술 소장품 특별전 《APMA, CHAPTER THREE》 2전시실 전경
BB&M 개관전으로 마련한 이불 개인전이 반가운 이유는 그간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 베를린의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전시 기관에서 회고전으로 갖느라 분주했던 이불 작가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다뤄온 작가가 최근 가장 몰두하고 있는 입체적 회화 작업 〈퍼듀(Perdu)〉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잠복해 숨어 있다는 뜻을 지닌 이 시리즈는 그간 해외 갤러리나 아트페어에서 단편적으로 소개됐던 작업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여러 작품이 한 자리에 모인다. 나무판에 아크릴 페인트를 칠하고 자개를 정교하게 배치한 다음 갈아내고 칠하고, 다시 쌓고 갈기를 수십 번씩 반복해 제작했다. 벚꽃과 진달래꽃을 연상케 하는 고운 핑크 컬러가 출렁이는 가운데 자개 조각들이 견고함을 부여하며 오묘한 빛을 발하는 이 회화 작업은 두께도 무게도 만만찮다.

BB&M 갤러리 개관전 《이불》개인전, 전시 전경, 2021ⓒBB&M




또 다른 평면 작품 ‘벨벳 시리즈’도 흥미롭다. 실크 벨벳 평면에 자개 조각, 유리 파편 등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된 치밀한 장면을 펼쳐낸다. 작가가 천착해 온 유토피아의 분열적 서사와 한국의 복잡한 냉전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주제 의식이 그대로 이어진다. 작가가 요즘 성북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핀셋을 손에 쥔 채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직조한 황홀하면서도 분열적인 풍경의 콜라주다.
BB&M 갤러리는 이불이 고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으며 광주비엔날레 전시디렉터 등을 역임한 미술평론가 제임스 리와 PKM 갤러리, 갤러리바톤의 디렉터로 활동한 허시영, 두 사람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이불 개인전은 11월 27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