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작부터 다이애나는 길을 잃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홀로 스포츠카를 운전해 왕실 식구들이 성탄절 휴가를 보낼 저택을 찾아가는 길. 어릴 적 살았던 동네임에도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를 세우고 길가의 작은 식당에 들어갑니다. 샤넬 백을 들고 선글라스를 쓴 우아한 스타의 모습, 조심스러운 제스처로 자신의 향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카운터로 걸어간 그는 점원에게 말을 건넵니다. “I’ve absolutely no idea where I am(내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영국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스펜서〉가 극장 상영 중입니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익숙한 형식의 전기 드라마가 아닙니다. 영화는 2시간 동안 ‘길을 잃은’ 다이애나의 심연으로 관객을 이끕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동화처럼 보였던 공주님의 삶은 사실 지독한 악몽과 같습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거대한 저택에서 창백한 얼굴로 유령처럼 떠도는 다이애나.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와 함께 한 순간들만 잠시 온기가 돌 뿐. 숨 막히는 왕실의 관습과 통제, 불행한 결혼의 굴레에 갇혀 몸부림치는 다이애나의 몸짓은 처연하고 처절합니다.
영화는 숱하게 얘기되고 가공된 왕세자비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감각하게’ 만듭니다. 다이애나로 변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실로 압도적입니다. 그간 작가주의 감독과 일하며 쌓아 올린 섬세한 연기력으로 연약한 새처럼 바들거리는 영혼을 완벽히 표현해냅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지닌 독특하고 반항적인 이미지 또한 다이애나란 인물의 ‘복잡성’을 그리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합니다. 유명세의 빛과 어둠, ‘보여지고 왜곡되는’ 삶의 피로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두 여성의 공명.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요주의여성 #31’을 찾아주세요)
〈스펜서〉는 단지 먼 나라 공주의 슬픈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감옥처럼 답답한 현실,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우울과 절망감.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한 번이라도 느낀 사람이라면 스크린 속 다이애나의 고통이 피부로 느껴질 겁니다. 어떤 이들에겐 놀랍도록 개인적으로 다가올 영화.
다행히도 영화는 해방의 희망까지 담아냅니다. 자기 파괴의 충동을 이겨내고 잃어버린 나를 되찾을 결심을 한 다이애나는 드레스를 벗고(허수아비에게 주고) 사냥터로 향합니다. 손을 번쩍 들어 왕실 사람들의 총질을 멈추게 한 뒤, 두 아들의 손을 잡고 탈출하듯 숲을 내달리는 다이애나. 홀로 타고 왔던 자동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저택을 빠져나온 그는 마침내 한결 편안한 얼굴로 도시의 풍경을 응시합니다. 영화는 끝났지만 이 아름답고 처연한 여인의 초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