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피해자 변호사 서혜진의 담담한 기록

삶은 법정 밖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변호사 서혜진은 <법정 밖의 이름들>에 고통을 말하고 듣는 법을 기록했다.

프로필 by 전혜진 2025.10.03
블랙 블레이저 재킷은 s/e/o. 셔츠와 타이, 팬츠,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블레이저 재킷은 s/e/o. 셔츠와 타이, 팬츠,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법정 밖의 이름들>은 약 14년간 피해자 변호사로서 활동한 기록이자, 법률의 문제점과 제도적 한계를 담은 책입니다. 지금 이 책을 꺼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우리는 보통 자신이 피해자가 된다면 합당한 사법제도가 만들어놓은 절차 속에서 제대로 보호받고,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을 거란 막연한 상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책의 ‘이름들’이 모여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 변호사 생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해요.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도 흩어지고 기억도 휘발돼서 늘 찝찝했거든요. 다음 세대, 특히 더 어린 세대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분명 있는데 말이죠. 중요한 마음과 기억에 대한 기록과 정리는 충분히 된 것 같아, 스스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사람들에게 법이라는 건 생각보다 멀게 느껴집니다. 우리 법은 온전한가요

법은 고정된 채 오랫동안 같은 모습일 거라 생각하는데 딱딱하거나 고착화된 건 결코 아닙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어떤 시대 어떤 감정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굉장히 달라지죠. 그러다 법이 바뀌거나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요. 법은 항상 우리 삶 속에 있지만, 사실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은 법을 대면하는 순간이 없어야 더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세상의 변화를 법이 얼마나 빠르게 따라잡느냐가 중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책의 제목을 <법정 밖의 이름들>이라고 지은 이유는

우리는 법을 마지막 정의의 보루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법정 밖에서 대부분의 일이 일어나고, 어떤 피해는 법정의 문턱조차 넘지 못해요. 저는 지금도 법정 밖에 더 애정이 있고, 그곳에 더 많은 이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성폭력, 아동학대,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이름에는 ‘미나들’ ‘채영들’처럼 ‘들’자를 붙였어요. 결코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주요 사례로 다뤄진 데이트 폭력이나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는 어린 여성들이 대부분입니다. ‘미투’ 이윤택, 안희정 사건, 텔레그램 N번방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든 숱한 사건의 피해자 변호사로서 그 여성들의 얼굴과 마주하며 든 생각은

피해자는 모두 다르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테두리에 가두는 건 불가능하고 굉장히 어리석은 일이에요. 피해를 더욱 덧나게 하는 행위이고요. 피해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가해는 의도하지 않아도 발생할 수 있고, 피해는 입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우리는 그 경계에서 어디에 귀 기울여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죠.


처음 ‘수미’라는 피해자를 만나고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죠. ‘술에 취하지 않은 젊고, 평범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와 같은 표현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들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보고, 피해자는 울고 도망치고 약해야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인데요

‘피해자다움’이란 건 없어요. 우리 의식에 작용하는 피해자의 이미지는 슬퍼하거나 힘이 없거나 그럴 이유가 있다는 편견에서 온 말이죠. 시대마다 바뀌는 그런 편견 때문에 피해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다움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일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 시야를 흐리게 하는 안경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피해자가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죠. 피해자의 고통은 ‘증명 불가능한 감정’으로 밀려나 버리면서요.


피해자 변호사로서 수많은 얼굴들을 마주한 기록을 담은 <법정 밖의 이름들>. 서혜진 변호사는 이 책을 말미암아 법정 밖에서 잊혀진 이름들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피해자 변호사로서 수많은 얼굴들을 마주한 기록을 담은 <법정 밖의 이름들>. 서혜진 변호사는 이 책을 말미암아 법정 밖에서 잊혀진 이름들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책에는 실제 피해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친족 성폭력 사건이죠. 굉장히 어렵고 민감한 데다 보통 피해자가 피해를 입고 곧장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부분 굉장히 과거 일을 얘기하고, 그 이야기를 꺼낼 땐 이미 늦어서 가해자가 적법한 처벌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한두 번의 일시적 피해로 그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이 사건을 다룰 땐 피해자들이 기억하기 싫은 순간을 아주 오래전부터, 정말 잔인하게 파헤쳐서 끄집어내야 돼요. 저는 그걸 끌어 모아 경찰서에 가져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해주고요. 미안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물론 사법 절차나 법 제도의 한계로 인한 문제점도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피해를 마주하는 순간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최근 가장 뜨거웠던 사건은 최말자의 재심입니다. 1964년 밤길을 걷던 18세의 최 씨는 자신을 넘어뜨리고 강제로 키스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는데, 중상해죄 유죄 선고를 받고 범죄자가 됐죠. 61년 만에 비로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법의 관점에 의하더라도 굉장히 이상한 판결이에요. 재판과 수사 과정이 인권 말살 과정 자체인 거죠. 법정에서는 ‘이렇게 된 마당에 가해자랑 결혼하라’고 했다지요. 무죄를 받기까지 61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답답함이 얼마나 컸을까요. 대한민국 국민인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려 법에 의해 중범죄자가 된 상황 말이죠. 그래도 할머니는 방통대를 다니면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점점 알게 됐고 다행히 그녀가 뭔가를 하려고 했을 때 곁에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지원 단체도, 제가 아는 변호사님도. 할머니 한 사람이지만, 언제든 그 부당함에 목소리를 낸다면 굉장히 많은 이들이 함께할 거라는 좋은 사례를 세상에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최말자 씨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메시지를 던지셨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거죠.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이네요

‘강간하려는 사람의 혀를 깨문 건 정당방위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은 법대를 나왔거나 법 공부를 한 분들은 교과서에서 무조건 보는 유명한 판결 사례였어요. 최말자 씨는 이름도 지워진 채 ‘피고인’의 삶을 살았는데 이제 그 이름을 사회적으로 되찾았고 ‘나는 죄가 없다’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공표했습니다. 대한민국 법 역사상 아주 큰 획을 그었다고 생각해요. 이 ‘운동’에 어린 친구들도 많이 공감하더군요. 아마 최말자 할머니를 보고 그 시절 이런 사법이나 수사기관에 피해를 입은 분들도 많이 위로받았을 거예요. 많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사례죠.


분노가 끓어오르는 순간이 많았을 텐데, 그 분노를 어떻게 활용하나요

늘 고민하는 지점이에요. 저는 변호사 중에서도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인 데다 표정 변화 없이 차분하게 해 나가는 타입은 아니거든요(웃음). 물론 검찰이나 법정조사를 하다가도 한 번은 참아요. ‘이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라는 생각이 축적되면, 그것이 분노 포인트가 되고, 의지가 달아오르죠(웃음). 다만 눈물 나는 순간은 거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없고요. 분노가 먼저죠. 분노의 순간을 차분하게 제어해야 되는데 저는 잘 못해서, 한참 뒤에 ‘그때 왜 그랬을까’ 하며 누워서 이불 킥해요.


‘인권 변호사’라는 말보다 “오늘 멋지세요”라는 말을 더 좋아해서 패션에도 신경 쓴다죠. 피해자들이 가장 어두울 때 만나는 사람이기에 그 옆에 멋지고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인식하길 바란다면서요

사실 우리 피해 현장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아요. 피해자도 똑같은 사람이고 저랑 재미있는 얘기할 때도 많고요. 인권 변호사라는 말을 싫어하는 건 법조인을 가두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어수룩해야 되고 다 낡은 옷을 입고 돈을 좇지 말아야 되고…. 저는 예쁜 거 입고 이왕이면 피해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거든요. ‘인권’은 굉장히 무거운 단어이고, 앞에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니까. 사실 경찰서와 법원을 행복해서 가겠어요? 피해자는 변호사를 대부분 안 좋은 일로 만나는데 그렇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밝은 거, 재밌는 거, 예쁜 거 보면 기분이라도 좋아지지 않을까요. 피해자들은 20~30대가 가장 많은데, 그 친구들의 세상에 공감하고 싶고, 그러려면 우선 깔끔한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피해자들이 또 하나 두려워하는 게 ‘가해자는 변호사를 몇 명이나 선임했대요’ ‘그 법인이 되게 비싼 곳이에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내 옆에도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면 그래도 안심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멋진 걸 좋아하고요!


책에서는 ‘누가 옳은가’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듣고 응답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다정하게 말씀하더군요. 법정 밖 목소리를 더 크게 듣기 위해 어떤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그저 편견 없이 피해의 본질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우리는 그걸 보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냐, 피해가 어디서 발생했느냐 이런 걸 따지다 보면 결국 이 피해가 무엇인지, 피해자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놓치기 쉽거든요. ‘피해자다움’에 사로잡히면 ‘피해자인데 왜 이런 행동을 하지?’ ‘왜 이런 험한 말을 하지?’ 이러다 보니 본질은 달아나죠. 피해자 관점에서 보려는 태도로 완전히 기존 패러다임을 바꿔야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피의자나 가해자의 시선에서 사법 절차나 제도가 쓰여진 것이 많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조금 더딘 것 같고요. 일상 속에서는 상대방 의사를 존중해 주려는, 나만큼 상대방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돼야 해요. 법은 되게 느리거든요. 스토킹 처벌법은 국회에 발의된 지 22년 만에 통과됐어요. 일본이나 영미권에서는 이미 1990~2000년대에 제정됐는데 말이죠. 그건 한국 사회가 스토킹· 젠더 폭력· 교제 폭력 같은 문제를 사소한 일로 취급해 왔기 때문입니다. 법은 늘 가장 마지막에 따라가기 때문에 상대 의사에 대한 예민함이 사회에 필요한 것 같아요.


브라운 체크 블레이저 재킷은 Pushbutton. 셔츠와 아이웨어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브라운 체크 블레이저 재킷은 Pushbutton. 셔츠와 아이웨어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법정 밖에 놓인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시 전파하는 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요

재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건 당연하지만, 더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에 집착하고 그 결과가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요. 피해자 입장에서 본다면, 피해 회복의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일 뿐이거든요. 물론 그것을 기반으로 피해 회복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지만. 다만 재판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해야 사법 절차가 아닌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재판이 끝난다고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재판에서 이긴다고 삶에서 온전히 이기는 것도 아니죠. 지금 법으로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도, 쓰이지 못하는 피해도 있어요. 재판에 인생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법정 밖 사람 서혜진은 어떤가요

하하. 재밌는 사람은 확실히 맞는 것 같아요(웃음). 내가 웃기려고 한 누군가 웃으면 행복해하죠. 재밌는 얘기하는 거 좋아해요.


책을 통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차갑게 느껴질 것 같고, 따뜻하게 느꼈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더군요. 누군가에게는 용기나 해법이, 누군가에게는 반성이, 누군가에게는 드라마틱한 울림이 될 수도 있겠죠. 어떻게 받아들이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서 다양한 감상과 얘기들이 모여 또 다른 논의가 나오면 좋겠어요. 모두가 공통으로 느꼈으면 하는 건 ‘내가 나인 것에 대한 소중함’입니다.


출간 후 주변 반응은

부끄러워서 제발 책 잘 봤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데요(웃음). 그래도 의미 있는 건 주 구독자층이 20~30대 여성인데 60~70대, 80대 분들께 드렸더니 눈물 지으신 분도, 본인 생에 힘들었던 순간이 언어화되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걸 보고 깨달았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앞선 세대가 잘 읽었다고 표현한 것이 고무적이었습니다. 지금 변화된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는 분도 또 다른 관점을 알게 됐다고 얘기한 게 좋았습니다.


책 내길 참 잘하셨네요

물론입니다. 피해자 지원 현장에 함께한 변호사들, 현장 상담사나 활동가, 의사들까지 동료들이 좋았다고 얘기하면 좋더라고요. 아침에도 선배 변호사님이 독후감을 보내셨는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인정해 주니까, 정말 책 쓰기 잘했다 싶어요. 나만의 기록이 아니었어요. 혼자 한 게 아니라, 우리가 같이 기록한 거였더라고요.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회적 발언권이 약한 젠더 폭력 피해자들, 아동청소년과 함께하며 성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가정폭력, 아동학대 사건을 맡아왔다. 법정 안팎에서 쉽게 지워지는 이들의 회복을 돕기 위해 지금도 변론을 계속한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사진가 김민석
  • 패션 스타일리스트 이진혁
  •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채원
  • 아트 디자이너 강연수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