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한민용 앵커가 출근하는 세상

만삭의 앵커로 <뉴스룸>을 잠시 벗어난 한민용이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를 통해 묻는다. 매일 당신은 어디로 나아가고 있냐고, 자신에게 어떤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냐고.

프로필 by 전혜진 2025.09.26
블랙 블레이저 재킷은 s/e/o. 화이트 셔츠와 롱스커트는 모두 Gaze de Lin.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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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쌍둥이가 태어날 예정이죠! 만삭의 앵커로 2년간 함께한 <뉴스룸>을 떠난 지 한 달쯤 됐네요. 요즘 당신의 일상은

선배들이 너무 걱정 말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처음 <뉴스룸>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는 꾸준히 돌고 있던 궤도를 한순간에 이탈하는 기분이 들어 무섭고 이상했는데, 공교롭게도 하차와 맞물려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가 출간되고, 북 토크와 인터뷰 촬영 등 외부 활동을 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최근 휴직 브이로그도 찍었답니다(웃음).


뉴스 룸을 벗어나 뉴스를 바라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제가 뉴스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같은 회사 동료인 남편의 브리핑을 TV로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생경했어요. 요즘처럼 특보가 연일 발생하는 상황이면 정말 난리가 났었는데 집에서 편안하게 뉴스를 보고 있다니(웃음)…. 기분이 묘했어요.


처음 쓴 책 <내일은 조금 달라지겠습니다>가 취재기에 가까웠다면,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에는 흔들렸지만 아름다웠던 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지금 이 책을 꺼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나요

서문에서도 소개했지만 ‘안녕하세요 앵커님’으로 시작하는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됐어요. 막 진학한 것 같은 한 대학생이 어릴 때부터 뉴스를 꿈꿔왔지만 꿈을 쫓을 형편이 아닌 것 같다고 쓴 내용이었죠. 조언을 구하거나 답장을 기다린다는 말도 없었고요. 답장을 쓰려다 어떻게 써도 무책임한 답이 될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그러다 20대가 대부분인 저희 스태프들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흔들린다는 고민을 얘기하길래 제 이야기를 가볍게 들려주기 시작했어요. 수유리의 작은 동네 빨래골에서 태어나 동대문에서 옷도 팔고 마트에서 맥주도 팔고, 언론고시는커녕 스터디 모임조차 들어가지 못했던 얘기 말이죠. 다들 깜짝 놀랐고, 위로를 얻었다고 하더군요. “최초 혹은 최연소라는 타이틀 뒤에 그런 시기가 없었을 것 같았다”고, 타고난 조건으로 무탈하게 이 자리에 있는 줄 알았다고요. 사실 저는 실패를 꽤 많이 해봤어요. 그때 어쩌면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JTBC 최초 여성 메인 앵커이자 최연소 메인 앵커. 아무래도 앞에 붙은 수식어 때문에 현재의 저를 과장하고, 지나온 날이 축소되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JTBC 최초의 <뉴스룸> 여성 메인 앵커인 한민용이 흔들리는 청춘들을 위해 쓴 책.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

JTBC 최초의 <뉴스룸> 여성 메인 앵커인 한민용이 흔들리는 청춘들을 위해 쓴 책.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

책 제목은 단순해 보이지만, 앵커 님의 삶의 철학처럼 보이는 문장인데요. 특히 ‘여자’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제목은 편집자들이 건넨 몇 가지 후보 중에서 함께 골랐는데요. 특히 ‘여자’라는 단어는 아직 여성이 뉴스의 문을 열거나 주요 뉴스를 전하는 경우가 드문 데다 임신해서 배가 부른 여자 앵커가 뉴스의 문을 열고 닫는 건 역사적으로도 생경한 모습일 테니, 고민 끝에 ‘여자’라는 단어를 넣었습니다.


당장의 학비와 미래를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동대문 알바생이 운명적으로 뉴스에 열의를 품게 된 건 유학시절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때문이었죠. 그때를 기억하나요

그 사건이 결정적 트리거가 됐어요. 타임스퀘어 앞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저는 궁금했거든요. 칼을 든 흑인 남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경찰이 진압을 위해 총을 쏜 탓에 숨졌는데 그 행위는 또 얼마나 정당할까. 다른 부위에 맞출 수 있었던 상황 아니었을까. 한편으로는 경찰이 총살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무고한 희생자가 나왔을까…. 다양하고 복잡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기사로 나온 건 단 세 줄이었어요. 그때 저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어요. 이 세계와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이죠. 또 어떤 것이 정당한 것인지와 같은 거대 담론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죠. 저만의 답을 쓰고 싶었어요. 제가 알게 된 것을 알리다 보면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막연하게 믿었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스스로 1년 정도 시간을 줘 보기로 했어요. 사실 1년도 버틸 자신은 없었지만, 돈도 없고, 나이들수록 취업은 불리해질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저는 무조건 어디든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책으로 정리하다 보니 결정적 순간에 마치 결정적 선택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미래가 없었던 제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언론고시를 준비했지만, 스터디 모임조차 ‘광탈’하고 하릴없이 도서관에서 할아버지들과 신문을 나눠 읽던 시기가 참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나요

앵커가 된 후 처음으로 했던 인터뷰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제가 “동대문에서 옷과 맥주를 잘 팔았던 사람”이라고 신나게 얘기했더군요(웃음). 생각해 보면 거기 삼촌들과 언니들이 어린애가 오죽하면 여기까지 와서 일하겠나 싶어 잘해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내 열여덟과 열아홉 그리고 스무 살 초반에 너무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쓰면서 당시 느꼈던 감정을 복기하다 깜짝 놀랐어요. 그때 저를 잠식하고 있던 불안과 우울, 막막함, 두려움이 다시 덮쳐와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거든요. 결국 뉴스를 진행하다 돌발성 난청까지 왔고 그러면서 깨달았어요. 그간 저는 제게 고르고 고른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있다는 걸요. 모든 부정적인 기억을 딛고 당시 제게 잘해준 어른들을 기억하고 그때 한민용이 용감하고 도전적인 아이였다는 걸 스스로 들려줬던 거예요. 그러니 나는 어디서나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난 운 좋은 아이라고요. 이 부분은 책을 쓰면서 깨우친 거예요. 그러니 스스로에게 좋은 얘기만 들려주라고, 그게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이 사람은 예쁘게 생겼잖아요’ ‘이 사람은 머리가 좋았겠죠’ ‘돈이 많았겠죠’ 이런 식의 말을 해요. 자신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저도 과거에는 지금의 제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내 가능성은 나조차 모르는데 그 문을 굳게 닫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언론고시에 연이어 떨어지고 작은 경제지 기자로 입사했지만 두 달 만에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언론사의 인턴기자로 다시 입사했어요. 어려움 속에서 나와 나만의 것을 더 선명히 보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했나요

저는 메모장에 낱낱이 써요. 회사에서 나갔을 때 경우의 수, 안 나갔을 때 벌어질 일을 모두 적으면서 판단했어요(웃음). 정말 기자 일을 하고 싶은 건지 따져보기도 했고요. 근데 제대로 해보지 않은 상태였잖아요. 그전 회사는 편하고 좋았지만, 꿈꿔온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거든요. 다시 인턴을 하더라도 큰 언론사로 들어가기로 한 거죠. 간접적으로라도 그 세계에 관해 알 수 있을 테니 내가 원했던 삶과 다르면 미련 없이 대기업에 들어가 빨리 돈을 벌자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실패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니 주변에 언론고시 준비하는 친구들도 없었고 스터디도 다 떨어져버리니까 이 바닥을 잘 몰랐는데, 인턴 때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고, 어떤 인재를 뽑고 싶어 하는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도전하지 않았으면 더 헤맸을 거고, 헤매다 결국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스스로 ‘죽음을 좇는 기자’라고 명명했습니다. 죽음을 좇는 일은 참 고되고 힘들 것 같지만, 지금 당신을 만든 철학이기도 해요

사회부 기자로서 참사 피해자들을 만난 건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죠. 특히 제대로 죽음과 마주한 건 세월호 참사 때였습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생생하죠. 그때 유족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봤어요. 사고 당시 받은 상처는 물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으레 받아야 하는 상처를 알게 되면서, 점점 죽음을 좇고 싶었던 것 같아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공장에서 안타깝게 사망한 노동자 사고가 기억나요. 그때는 기업들도 이 문제에 무디게 대응했는데 사고가 나고 사망이 확실시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유족을 찾고 연락해야 하는데, 당시 유족은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다 “저거 아기 엄마네 남편 회사 아니야?”라는 말에 불안해 공장까지 달려 오셨거든요. 당시 저는 수습이라 제대로 기사를 쓰지 못하는 상태였음에도 타사 선배들이 현장을 기사화하고 취재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나도 번듯하게 기사로 피해자를 챙길 수 있는 기자가 돼 우리 사회에 더 이상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작은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무력감도 지속해서 쌓였겠죠

한다고 노력하는데 결국 죽음과 참사라는 것, 사고라는 건 끊임없이 반복되고 특히 산재 사건은 매일 무기력하게 반복되죠. 아무리 뛰어다녀도 결국 비슷한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무력함을 느낀 적도 있어요. 하지만 현장을 다니다 보면 활동가들부터 의료진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걸 보면서 세상이 조금씩 나아간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음 아프고 무력하다고 외면한다면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말이죠.


블랙 블레이저 재킷은 s/e/o. 화이트 셔츠와 롱스커트는 모두 Gaze de Lin.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블레이저 재킷은 s/e/o. 화이트 셔츠와 롱스커트는 모두 Gaze de Lin.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뉴스룸> 최연소 여성 앵커, 최초 여성 메인 앵커가 됐을 때 어떤 다짐을 했나요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익숙한 것만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데다 뉴스 시청층은 대체로 보수적이거든요. 제가 어색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전부터 주말 앵커로 오랫동안 시청자를 만나왔지만, 잘하지 않으면 그 다음 여자 앵커가 세상에 등장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자 앵커로 회사에서 최초로 했던 것들이 꽤 많아요. 단독 앵커도 처음이었고, 메인 앵커는 다른 방송 통틀어 이례적이었고요. 내가 잘하지 않으면 ‘다음 여자’는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못하면 저만의 실패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문을 닫아버리게 될까 봐 걱정했죠. 지금 돌아보면 잘한 부분도 있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이상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해요(웃음).


뉴스 룸과 세상 밖, 이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나요

시청자들은 뉴스를 진행하는 제 모습과 바깥에서 마주한 모습이 다르게 느껴지나 봐요. 하지만 그 세계는 분명 이어진다고 봐요. 평소에 저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전통시장에 장 보러 다니는데 그러다 보면 그곳에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 일상의 푸념을 자연스럽게 듣게 돼요. 제 앵커 멘트에도 많이 녹아들고요. 뉴스라는 건 사람들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니까, 뉴스가 끝나도 세상으로 분명 이어지죠.


뉴스 룸에 들어서면 평소보다 강해지는 면이 있나요

들어가기 전에는 꼭 그런 생각을 해요. ‘너 잘해야 돼. 그리고 제대로 해야 돼.’ 오히려 뉴스 룸에 있을 때보다 들어가기 직전에 훨씬 예민하고 바빠요. 룸에서 무엇을 얘기할 건지, 어떻게 앵커 멘트를 쓸지 바쁘고 치열하게 토론하거든요. 저는 카메라를 보고 있지만, 카메라 너머에 굉장히 많은 시청자가 있다는 생각에 그들과 눈 맞추고 자신감 있게 해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매일 다른 뉴스를 전해왔습니다만,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은 뉴스의 한 장면을 꼽는다면

<뉴스룸> 앵커를 할 때 소위 취약 계층에 대한 보도를 직접 기획하고 취재한 적 있어요. 특히 결식 우려 아동을 다룬 때가 잊히지 않습니다. 온세상이 다이어트 열풍인 상황에서 여전히 배고픈 아이들이 있고 나라가 밥을 먹이지 않는다면 자신이라도 먹이겠다고 나선 사장님들을 취재했어요. ‘선한 영향력 가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먼저 시작한 파스타집 사장님을 라이브로 인터뷰하는데 어떤 스태프 한 분이 ‘선한 영향력 가게’ 홈페이지가 다운됐다고 하시더군요. 설마 했는데 정말 저희 뉴스 때문에 다운된 거였고, 그만큼 세상에 동참하려는 사장님이 많았던 거죠. 코로나 시기라 자영업자들이 힘든 시기였는데도요. 물론 처음 기자가 됐을 때는 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점점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는데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해요. 내가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조금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요.


그렇게 매일 앞으로 나아가셨군요(웃음). 매일 어딘가로 출근하는 것, 매일 어딘가로 나아가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매일’이라는 말에는 무한 반복성이 있어서 좋아요. 왜냐면 오늘 내가 좀 못하더라도, 내일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꾸준히 해 나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를 넘어, 지금 한민용은 어느 세상으로 출근하고 있나요

백은선 시인이 “아이를 키운다는 건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불을 건너는 것”이라고 했어요. 일단 저도 당분간은 천국을 업고 지옥불을 잘 걸어 보려고요(웃음). 많은 여성의 고민이겠지만 저도 엄마의 삶과 한민용의 삶을 균형 있게 잘 맞춰보고 싶어요. 직업적인 면에서도 시대가 많이 바뀐 걸 체감하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뭘 할 수 있고 뭘 잘하는 사람인지 탐구해 보려고요.


독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이야기를 애써 고르고 골라 스스로에게 들려주기를.’ 지금 한민용은 스스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나요

솔직히 책에서는 멋있게 이야기했지만 두렵기도 해요. 앞으로 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래도 이 책을 써내려가며 느낀 건, 저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펼쳐질 다음 이야기도 너만의 방식으로 써 내려갈 수 있을 거니까 겁내지 말자’는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하고 있어요.


이 책이 빨래골부터 뉴욕 그리고 서울 여성에게 어떻게 닿았으면 하나요. 지금은 어느 정도 성장한 한민용이 흔들리는 여성들, 특히 꿈을 가진 어린 여성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열아홉 살 때 누가 저더러 “당신 나중에 최연소 메인 앵커가 될 겁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 헛소리라고 생각했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됐잖아요. 저를 돌아보며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가능성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특히 젊은 여성들의 가능성 말이죠. 저도 “재능이 있을까요?” “제가 과연 될까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런 질문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재단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누구든 갖고 태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탓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PROFILE

한민용 JTBC 기자 겸 앵커. 2013년 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자가 됐다. 2018년 주말 <뉴스룸>을 시작으로, JTBC 최초의 <뉴스룸> 여성 메인 앵커이자 최연소 메인 앵커가 됐다. 최근 쌍둥이를 임신해 재킷을 풀고 배부른 여성 앵커로 뉴스를 전하다 앵커석에서 내려왔다. 저서로 <내일은 조금 달라지겠습니다>가 있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사진가 김민석
  • 패션 스타일리스트 이진혁
  • 헤어 스타일리스트 이현정
  • 아트 디자이너 강연수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