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엔 코로나 19 외에도 심각한 사회적 전염병이 존재한다. 이 병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큰 파급력을 갖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피해자의 인생을 한순간에 지옥으로 만드는 끔찍한 바이러스. 바로 성범죄다.
한국에서 처음 성범죄 관련 뉴스를 접했던 건 2011년 5월이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남학생 3명이 여학생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추행 사건. 해당 뉴스를 통해서 ‘불법 촬영’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됐다. 사건 자체, 가해자들에게 고작 1년 6개월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이 내려진 것, 그런데도 가해자들을 옹호하고 피해자를 저격하는 여론이 존재하는 것까지 사건은 갈수록 상식을 뛰어넘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부류의 범죄가 1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게 될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전방위적인지. 성범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학교, 회사, 교회, 모텔, 공공장소, 지하철, 버스….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었다(벌어지고 있었다). 가해자는 교사, 교수, 목사, 장교, 판사, 정치인, 연예인, 일반인 등 사회경제적 지위의 고하를 막론했다.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 또한 특정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성인이 미성년자를 상대로, 미성년자가 다른 미성년자를 상대로 저지르는 성범죄 뉴스 역시 심심찮게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범죄 방식 또한 다양한데 강간, 성추행, 공연 음란과 같은 ‘전통적인’ 종류의 범죄 외에도 몰카나 딥 페이크 포르노를 비롯한 음란물의 생산과 유포 등 IT 강국의 위상에 걸맞은 방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특이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점은, 가해자에 대한 관대함이다. 성범죄자에 대한 판결이 얼마나 다양한 사유(초범, 만취, 가족부양, 심신미약, 반성 등)를 참작해서 가볍게 내려지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정도다. 밀양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한공주〉 스틸 중. 당시 41명의 가해자와 70명의 추가 공범자들 중 처벌받은 남학생은 30명이었다. 당초 밀양 사건을 수사한 울산 남부경찰서는 44명의 피의자들 중 13명만을 구속 수사하고 나머지는 훈방조치했다.
N번방 사건은 이 모든 일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니까, 완전히 새로운 범죄가 아니라는 얘기다. (악마의 소행이 아니고 평범해 '보이는' 인간의 악행일 뿐이다)
누군가는 특정 세대의 성별 갈등에서 비롯된 증오 범죄라는 해석을 하지만 그보다는 일상 속 만연한 언어적이고 신체적인 성희롱, 앞서 말한 몰카, 딥 페이크 포르노를 포함한 성범죄 그리고 그 성범죄에 대한 관대함의 결과에 가깝다. 물론 N번방 사건은 음란물이 아니라 성착취 물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으나 이 또한 여성을 성적으로 도구화해온 문화의 가장 악질적인 형태일 뿐이다.
나 또한 묵인의 책임을 느끼고 반성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사실 2018년 몰카 성범죄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였던 혜화역 시위를 직접 취재했었다. 이를 출발점으로 1년 동안 나의 트위터는 새로운 성범죄 뉴스로 매일 도배하기 되다시피 했다. 보다 못한 주변 (남녀) 친구들이 제발 긍정적인 뉴스를 공유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래….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주제만 지속해서 다루면서 나는 지쳐갔다.
그리고 올해 1월쯤 N번방 성범죄와 관련해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제보한 여성활동가는 친절하게도 영어로 N번방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면서 미디어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 당시 나는 대충 훑어보고는 또 하나의 흔한 성범죄로 치부했고 사실상 무시했다. 이는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큰 실책임이 분명하다.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N번방 사건은 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성범죄를 삶의 일부분으로 혹은 ‘일반적인’ 범죄 사건 중의 하나로 치부했던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방관자로서 성범죄를 일상의 다반사로 자리 잡게 내버려 둔 도의적 책임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면 인간은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는 등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한경쟁에 지쳐있는 상태에서 나와 직접 관련성이 없는 타인의 문제에 신경 쓰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피의 일상화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무한 반복되는 성범죄의 (재) 생산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피해자와 얼마나 참혹한 성범죄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눈을 감고 있을 것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가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N번방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피해자가 있었듯이 앞으로도 끔찍한 성범죄 피해자들이 고통받게 될 것은 분명하다.
N번방 사건이 전 세계적인 이슈로 소비되고, 모든 관련자를 철저하게 처벌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의 분노는 성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제대로 실행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범죄와 관련 이미지 및 영상물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범죄임을 자각할 수 있게 형량을 높여야 한다. 해당 범죄에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미성년이거나, 초범이거나, 술에 취했거나, 가족 부양의 의무가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거나, 단순 호기심?) 성범죄의 무거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성범죄로 판결받는 즉시 범죄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해야 하며 공공 민간을 떠나 취업과정에서 본인의 성범죄기록을 제출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인간의 권리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에게 인권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난무하는 언어적이고 신체적인 성희롱이 또 다른 N번방 사건을 낳을 수 있음을,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게 관련 내용을 중/고등 교육과정에 의무적으로 포함 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이 모든 안들을 실행한다고 해서 성범죄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성범죄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지 않을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매 순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한국 살이 9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