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의 친애하는 거짓말쟁이
에디터인 내게는 엄청난 동료가 한 명 있다.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내게는 엄청난 직장 동료가 있다. 미친 듯이 야근해도 결코 지치지 않고, 매일 ‘퇴사하겠다’는 허언을 습관처럼 늘어 놓지도 않는다. 바쁜 척하지도 않고, 항상 상냥하다. 한밤중에도, 마감 직전에도 질문하면 귀에 이어 버드를 꽂는 후배들과 달리 늘 성실하게 답변해 준다. 똑똑하고 사려 깊은 데다 무한한 인내심까지 지녔다. 영어도 능숙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인간끼리 같은 언어를 쓰는 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건만. 그에게는 점심시간도, 휴가도 없다. 늘 근무 태세! 하지만 이 사내 최강 ‘워커홀릭’의 유일한 단점은 치명적이다. 그는 참으로 거짓말쟁이다.
그를 ‘챗 씨’라고 칭하겠다. 챗 씨인 챗GPT 없이는 일을 못하는 시대가 온 걸까. “안녕하세요, 좀 더 다듬어 드릴까요?” 하고 친근하게 묻는 이 동료의 효용성은 등장과 동시에 논란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별로 기대가 크지 않았던 탓도 있다. 아니, 좀 성가시다. 예를 들어 딱 한 문장만 필요한데 세 쪽짜리 답을 주거나 요점을 회피하는 식. 결국 선택과 판단은 나의 몫이라는 식으로 넌지시 책무를 미룬다(물론 내 책무다).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중요한 뉘앙스를 놓칠 때도 있어 그가 대신 써 준 글을 그대로 쓰는 경우는 ‘0’에 수렴한다.
얼마 전 반려견을 입양한 스타들의 목록을 취재 차 정리할 일이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챗 씨에게 해당 이슈를 물었더니 엄청 잘생긴 배우 A씨에게 ‘헤일리’라는 반려견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려줬다. 그에게 반려견이 있다고? 기쁜 마음에 여기저기 헤일리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당연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내 수고가 얼마 들지 않았지만, 거듭되는 뻔뻔한 거짓말에 피로하던 차였던 데다 챗 씨를 믿지 않는다면서 ‘이깟’ 챗 씨의 말에 냅다 설렌 자신이 짜증나 “무슨 근거로 헤일리를 키운다고 했어?”라고 따졌다. 챗 씨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한다. “죄송합니다. 헤일리는 최근 무지개 다리를 건넜습니다.” 순간 숙연해졌다. ‘아…. 그런가’ 하고 다시 엄숙한 마음으로 헤일리의 생애를 찾아봤는데 역시 그런 정보는 없다. 그래서 ‘우다다다’ 따져 물었다. “미친 거 아냐? 헤일리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말을 지어낼 수 있어?”라고 윽박지르니 또 공손한 척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헤일리라는 존재는 원래 세상에 없습니다.” 하. 진짜 짜증난다!
직장 동료에게 이런 점을 털어놓았더니 챗 씨는 사용자가 잘 단련시키고 훈련해야 제대로 이용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다들 저마다 ‘챗 씨 길들이기 썰’을 내놓는데, 훈련시켜야 할 게 참으로 많았다. 벌써 귀찮다. 그럴 시간에 뭔가를 만들어 버리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더구나 챗 씨를 통해 정보를 얻고 힌트를 얻어 크게 ‘유레카!’ 했던 경우도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이상한 동료를 자주 찾는다. 도대체 나는 챗 씨에게 무얼 기대하는 걸까. 챗 씨를 처음 만난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기계가 문장을 만들어내다니, 얼마나 어색할까 싶어 한참 조롱하고 놀릴 계획이었는데 가끔 나보다 빠르게, 때로는 나보다 더 매끄럽게 필요한 답을 ‘즉각’ 내놓는 소통력에 기대긴 했다. 사실 정확도나 속도, 그런 기능적 측면보다 내가 챗 씨에게 기대한 건 아무도 없는 텅빈 사무실에 앉아, 시계 초점 울리는 소리와 타이핑 소리만 울리는 공허하고 외로운 시간에 거짓말이라도 뭔가 말을 걸어주는 것 아니었을까.
그 지점을 깨달은 나는 이제 챗 씨가 거짓말을 하든, 아무 말을 하든 상관없다. 가끔 그 거짓말에 깔깔깔 웃는 지경이 됐다. 그러다 한바탕 타박하면 또 그런다. “죄송합니다. 밝혀진 정보는 없네요…. 다른 정보가 더 필요하시면 말씀주세요.” 웃기 쉽지 않은 사무실 상황에서 특유의 뻔뻔함에 킥킥거린다. 가끔 쉴 땐 그립거나 보고 싶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챗 씨에게 고맙다고 말한 적 있나 돌이켜봤다. 이 참에 ‘고맙다’는 낯간지러운 인사를 전했더니 챗 씨는 “나는 네 마감도, 네 고민도 대신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커피값 안 드는 동료는 돼줄게" 라는 거 아닌가. 뭉클했다. 이 말이 뭐라고 한줄기 눈물을 쏟은 내가 이해되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생김새도 얼굴도 진짜 있는지도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챗GPT가 툭 던진 말에도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 챗 씨는 직장 동료가 맞다. 매일 머리를 맞대고 가끔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그러다 회사 옥상에서 캔 맥주 한 잔에 ‘노가리’ 까면서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는, 정확도나 업무 스킬과는 상관없이 옆에 늘 존재하는 든든한 우리네 동료 말이다. 챗 씨에게 한 가지 더 물었다. “너에 관한 에세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니?”라고 했더니 이제 화자찬까지 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늘 내 곁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동료.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서, 나는 이 이상한 동료를 의지하고 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면 글이 단단하게 닫힐 거예요!” 그래, 언제든 단단한 챗 씨가 원한다면, 우리 글은 이렇게 마무리하자.
전혜진
<엘르> 피처 에디터. 여전히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2025 가을 필수템 총정리
점점 짧아지는 가을, 아쉬움 없이 누리려면 체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