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를 찌르는 타인의 향수, 바르기만 했는데 속이 울렁울렁한 화장품 냄새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듬뿍 발라야 하는 자외선 차단제가 향이 너무 강해 온몸이 아픈 듯해 급히 공중화장실에서 세수한 적 있다. 향은 적당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면 아로마 테라피처럼 기분이 좋아지고 피부에도 해롭지 않지만 반대인 경우, 알레르기, 두통, 오심 등 다양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향 물질 분자는 너무나 작고 코를 통해 뇌로 신호가 바로 전달되기 때문. 그 민감도는 인종에 따라,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런데 화장품, 생활용품에 들어가는 향료는 한가지 물질이 아니다. 수많은 향 물질이 섞인 복합체고 그걸 전 성분리스트에 다 나열할 수 없기 때문에 ‘향료’로 뭉뚱그려 표기한다. 큰 회사는 직접 향료를 개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회사가 향료를 구입해서 첨가하는 식이라 그 안에 어떤 물질들이 들었는지는 화장품 제조사도, 판매자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향이 유해하다는 것은 대부분 독성이 아니라 알레르기 우려 때문이다. 한 지인은 아무리 좋다는 유기농 브랜드 스킨케어 제품을 써도 피부가 붉어지고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하다 결국 향 알레르기란 사실이 밝혀졌다. 화장품부터 섬유유연제, 방향제 등 모든 물건을 향 성분이 없는 것으로 교체한 후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향 알레르기 체질이 아니더라도 임신 중 또는 신생아가 있을 때, 호흡기 민감자, 항암 등으로 체력이 저하된 환자, 후각이 예민한 동물을 키울 때, 의료인이나 요식업 종사자, 조향사처럼 향기를 다루는 사람 등은 무향 제품을 쓰는 편이 안전하다.
향료산업의 본산이자 소비도 많이 하는 유럽인만큼, 2009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화장품 상임위원회(The European Commission’s Standing Committee on Cosmetic Products)는 유난히 알레르기를 많이 일으키는 향 성분 26가지를 지정해 유통되는 제품 라벨에 표기하도록 의무화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식약처도 ‘착향제 구성 성분 중 기재 표시 권장 성분’ 26가지를 지정했다.
십 년 후, 유럽연합은 하이드록시이소헥실3-사이클로헥센카복스 알데하이드(HICC), 아트라놀, 클로로아트라놀 3종의 향 성분이 포함된 제품 판매를, 2021년엔 제조를 금지했다. 국내도 그에 맞춰 2019년 기존 26종 중 하나였던 HICC를 포함해 향 성분 3종을 금지하고 2020년엔 25가지 알레르기 유발 성분을 라벨 표기 의무화했다. 이 성분들은 전 성분표에 ‘향료’로 뭉뚱그릴 수 없고 각기 표기해야 한다. 단, 사용 후 세척되는 제품은 0.01% 이상, 그 외는 0.001% 이상 함유한 경우에 한하고 용량 10mL(g) 초과 50mL(g) 이하인 소용량 화장품은 공간 부족 문제로 표기를 생략할 수 있다.
「 유럽 향료 규제 강화 VS 아직 국내에서 합법인 릴리알
」 올해 3월엔 유럽 연합이 부틸페닐메틸프로피오날(릴리알)을 알레르기 유발 향 성분일 뿐 아니라 생식독성(태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물질로 전면 금지해 국내에도 곧 같은 조치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릴리알은 백합 향기가 나서 화장품뿐 아니라 세제, 방향제 등에 두루 쓰이는 물질이다. 또한 유럽은 2025년까지 60종의 새로운 향 성분을 라벨 표기 의무화할 예정.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편이어서 2020년 캘리포니아주가 수은, 프탈레이트, 포름알데히드처럼 당연히 안 들어가야 할 24가지 독성물질만 금지했다.
향료에서 천연, 인공은 딱히 관련이 없다. 사용이 금지된 향 성분 3종 중 2가지가 이끼 추출물에서 나오며, 알레르기 유발 성분 25종의 상당수도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이다. 또, 식물성 에센셜 오일이야말로 향 성분의 집합체여서 향기 좋은 자연주의, 비건 브랜드에선 무향 제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 향을 통한 심리적 효과도 있고 소량이면 알레르기가 안 생기는 사람도 많아서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말입니다.” 궤변으로 들릴 수 있지만 무향과 무향료는 엄연히 다르다. 무향은 향이 아예 없는 것을, 무향료는 향료를 별도로 첨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특히 장미수, 시어버터 등 다양한 천연 원료는 고유의 향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만약 좋지 않은 냄새라면 무향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마스킹 향료들을 쓰는 경우도 많다. ‘향료 무첨가’, ‘무향료’, ‘fragrance free’ 모두 향료를 일부러 넣지 않았단 거지 향 물질이 아예 없단 뜻이 아니다. ‘인공 향료 무첨가’가 표기돼 있다면 제품 속 천연원료가 향료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최근 ‘26가지(HICC 포함) 알레르기 유발 향 물질이 없다’고 광고하는 제품이 많다. 다른 향 물질은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며, 누구나 알레르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니다.
향 물질이 없거나 아주 적게 포함한 원료만으로 만든 무향인 동시에 무향료 제품들은 민감성 피부용 기초 화장품이나 연고 같은 의약품에 많다. 석유에서 추출했다고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미네랄오일, 페트롤라툼(상품명 바셀린)이 대표적인 냄새가 없으며 쉽게 썩지 않는 물질이어서 오히려 예민한 사람, 환자들에게 널리 쓰인다. 또 유럽, 일본의 저렴한 드럭스토어 브랜드 중 무향, 무향료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