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집은 없습니다_빚동산 가이드 #4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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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집은 없습니다_빚동산 가이드 #4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기어코 집을 산다.

김초혜 BY 김초혜 202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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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생애 최초의 기억이 있을 테다. 나는 네다섯 살쯤 됐을 때 새하얀 눈이 쌓인 마당에서 아빠와 눈사람을 만들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내 삶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마당 한가운데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는 조그맣고 낡은 단독주택에 살았다. 부모님 소유의 집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매달 집주인에게 집세를 냈다.
 
여섯 살 때 이사를 했다. 살던 곳에서 가까운 빌라에 전세로 들어갔다. 반지하였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빌라와 비교하면 훨씬 쾌적한 집이었지만, 반지하는 반지하였다. 장마철이면 덥고 습했다. 그렇다고 그 시기가 괴로웠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빌라 주민들끼리 친했다. 여름밤이면 빌라 앞에 마련된 평상에 삼삼오오 모여 수박을 먹었다. 이웃 간 소통이라는 게 남아있던 시대였다. 빌라에 살면서 동네 친구도 많이 만들었다. 따뜻한 추억을 켜켜이 쌓은 계절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가족은 또 집을 옮겼다. 이번엔 신축 20평대 아파트였다. 드디어 우리 가족 소유의 집을 얻었다. 빌라에 살 때는 친구들과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아파트로 오고 난 후에는 잘 정돈된 단지 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온갖 장난을 치며 다 함께 컸다. 우리 가족은 그 아파트에서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또 이사했다. 같은 아파트지만 평수가 넓은 동으로 집을 옮겼다. 그 이후 나는 서울로 상경해서 독립했고, 현재에도 부모님은 그곳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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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반지하 원룸, 빌라 그리고 아파트

TMI가 제법 길었다. 구구절절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을 추억한 이유는 ‘세상에 나쁜 집은 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낡은 단독주택, 빌라, 신축 아파트 중에서 어디에 살고 싶나”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신축 아파트라고 답할 것이다. 주거 환경, 투자 가치로 봤을 때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부터 쾌적한 아파트에서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정에 따라 일단 원룸, 오피스텔, 빌라를 골라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선택권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는 스무 살 이후 기숙사, 고시원, 반지하 원룸, 투룸 빌라를 거쳐 아파트에 정착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와 비교하면 스무 살 이후 거쳐 왔던 주거지들의 컨디션은 열악하다. 그렇다고 그 시기에 내가 살았던 집들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반지하 원룸에서도 내 나름대로 삶을 살았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요리를 하고, 영화를 보며 전율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고민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연애도 했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낡은 단독주택, 반지하 빌라에서도 따뜻한 추억을 쌓았듯 말이다. 부모님이 아파트 한 채 거뜬하게 사줄 수 있는 금수저가 아니라면 누구나 사다리를 타듯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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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마음으로

물론, 부모님 세대와 지금은 환경이 다르다. 우리 윗세대는 은행에 저축만 열심히 해도 집을 살 수 있었다. 적금 금리가 두 자릿수였던 시대였기에 저축 외에는 다른 재테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원룸, 빌라에 살면서도 열심히 저축하면 언젠간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이런 희망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뉴스에서 10억, 20억짜리 아파트 기사만 접하다 보면 허탈감만 쌓인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현재 힘든 시기를 보내는 2030세대 상당수는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다”라며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런데 지금 2030이 기득권이 될 30년 후에는 어떨까. 당연히 20·30세대는 50·60세대가 돼 있을 것이며, 이들 중 상당수는 내 집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똑같이 내 집 마련이 힘든 시기에 사회생활을 했지만, 누군가는 기어코 집을 사고 누군가는 계속 무주택자로 남아있을 것이란 뜻이다.
 
이제 막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사회로 나온 사회초년생이라면 ‘나는 벼락거지가 됐다’라는 자괴감에서 하루빨리 빠져 나와야 한다. 지금 당장 열악한 주거지에 살고 있더라도, 자신의 처지를 폄하하면 안 된다. 이제야 사다리를 탔다고 생각하고, 차근히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해야 한다.  
 
눈을 딱 감고 돈을 모아야 한다. 종잣돈을 모으면 서서히 길이 보인다. 10억 넘는 집은 그만 봐도 된다. 대출을 받아서 경기도에 2억대 아파트부터 시작해도 된다. 거기서부터 차근히 올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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