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밀라노와 파리 감성이 만난 무적의 디자이너

파브리치오 카시라기가 공간에 우아한 미학을 불어넣는 법.

프로필 by 이경진 2025.11.04

디자인의 심장, 밀란에서 태어나 자란 파브리치오 카시라기(Fabrizio Casiraghi)는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건축 언어에 매혹됐다. 그는 알도 로시(Aldo Rossi),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le Castiglioni), 렌초 피아노(Renzo Piano) 같은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들을 배출한 ‘폴리테크니코(Politecnico)’에서 공부한 후 파리로 건너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스튜디오에서 경력을 쌓으며 국제적 시야를 넓혔다. 하지만 정형화된 대형 사무소보다 유연하고 직관적인 크리에이티브에 끌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밀란의 상징적 저택인 빌라 네키(Villa Necchi Campiglio)와 정원을 보존하는 이탈리아 환경기금(Fondo Ambiente Italiano)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마이애미 비치의 레지덴셜 프로젝트.

마이애미 비치의 레지덴셜 프로젝트.

파브리치오 카시라기.

파브리치오 카시라기.

고풍스러운 주택의 장식적 디테일, 시간이 축적된 공간에서 느껴지는 정서에 매료된 파브리치오는 이 경험을 전환점으로 삼아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파브리치오 카시라기는 밀란을 기반으로 다양한 건축 및 인테리어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자신의 조형 언어를 확립해 왔다. 그의 디자인은 공간의 볼륨에 주목하면서 그 안에 절제된 우아함과 순수한 감각, 고유의 소재감과 부드러운 색채, 이국적인 오브제를 더해 완성된다.


파브리치오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다채로운 요소를 감싸안는 ‘빛’의 역할이다. 파브리치오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공간은 단순한 기능 이상의 감각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리 6구에 있는 ‘오텔 데 그랑 브아야죄르(Hôtel des Grands Voyageurs)’, 런던 노퍽 스퀘어의 클래식 빅토리아풍 ‘그랜드 호텔 벨뷰(Grand Hotel Bellevue)’, 생트로페의 ‘오텔 라 퐁슈(Hôtel La Ponche)’, 1930년대부터 밀란의 상징적 장소였던 레스토랑 ‘산트 암브로에우스(Sant Ambroeus)’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업까지. 지금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디자이너지만 파브리치오의 태도와 디자인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화려함보다 절제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끊임없이 배움으로써 성장하려는 파브리치오 카시라기를 파리에서 만났다.


노르딕 노츠(Nordic Knots)와 협업한 러그 시리즈.

노르딕 노츠(Nordic Knots)와 협업한 러그 시리즈.

크림색의 오목한 벽과 욕조의 조화가 아름다운 배스룸.

크림색의 오목한 벽과 욕조의 조화가 아름다운 배스룸.


밀란에서 디자인계 사람들이 모여들기로 유명한 ‘바 바소(Bar Basso)’에서 우연히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계기로 파리에 본인의 스튜디오를 오픈했다고 들었다

현재 PR을 맡고 있는 친구와의 대화였다. 디모레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때였고, 이직을 고민하던 차에 그가 “너만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조언했다.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이사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왜 파리였나 밀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미감이나 취향에선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장식미술과 관련해 파리는 최고의 도시니까. 역사적으로도 인테리어 디자인은 파리보다 더 아름답고 융성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최근 작업에서는 정제되면서도 절충적인 감성이 엿보인다. 현재 당신의 디자인 비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밀란에 오픈한 프라이빗 클럽 ‘와일드 클럽(The Wilde)’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캐주얼 카페 겸 레스토랑 ‘산트 암브로에우스’를 디자인한 후 그와는 전혀 다른, 특정 계층을 위한 클럽을 설계하는 경험이라 더욱 특별했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는 클럽 오너가 영국 출신으로, 내 문화적 배경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어 그 자체로 흥미롭고 도전적이었다.


비교적 강한 스타일과 취향을 가진 클라이언트와 협업할 때 당신의 미학을 어떻게 조율하나

나는 항상 새로운 걸 배울 준비가 돼 있다. 예를 들어 와일드 클럽이라는 이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은 특정 멤버만 방문하는 장소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클럽 오너는 본인의 영국 문화에서 영감받은 다양한 패턴을 공간에 녹여내길 원했다. 그동안 내가 한 프로젝트에는 패턴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번 작업에서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스타일의 패턴을 적용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프로젝트는 항상 상호 간의 대화라고 본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기보다 다른 스타일이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내 스타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푸른색의 벽 위를 가로지르는 기하학적인 선까지 패턴을 적용하는 데 능한 카시라기의 캐릭터가 묻어나는 또 다른 배스룸.

푸른색의 벽 위를 가로지르는 기하학적인 선까지 패턴을 적용하는 데 능한 카시라기의 캐릭터가 묻어나는 또 다른 배스룸.

런던 그랜드 호텔 벨뷰(Grand Hotel Bellevue)의 바 폰디케리. 브랜드 보디(Bode)와 협업한 태피스트리로 포인트를 줬다.

런던 그랜드 호텔 벨뷰(Grand Hotel Bellevue)의 바 폰디케리. 브랜드 보디(Bode)와 협업한 태피스트리로 포인트를 줬다.


빈티지 요소와 현대 디자인을 조화롭게 섞는 당신만의 스타일 철학이 있다면

나는 항상 다양한 요소를 혼합하고, 그렇게 섞인 요소들이 공간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도록 고민한다. 동서양의 문화적 요소는 물론이고 컬러와 재료, 값싼 오브제부터 고급스러운 오브제, 가볍거나 무거운 물체들을 조화롭게 섞어 나만의 균형을 만들어낸다. 이런 레이어드를 통해 나만의 균형감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당신의 인테리어는 잘 큐레이션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공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먼저 공간을 의뢰한 고객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5개 이상, 10개 미만으로 찾아오라는 숙제를 준다(웃음). 핀터레스트나 인스타그램에서 찾은 공간 이미지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예술 작품 등 본인의 취향이 담긴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렇게 모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내가 상상하는 무드보드를 만든다. 이 무드보드는 꽤 디테일하다. 공간 분위기와 사용하고 싶은 재료까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구성되는 중요한 단계다. 이 무드보드가 만들어지고 나면 프로젝트의 50%는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여행과 문화는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영감이 되곤 한다. 최근 본인의 창작 과정에 깊은 영향을 준 여정이나 경험이 있다면

여행은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다. 프로젝트로 출장을 가더라도 가능하면 하루이틀 정도는 꼭 자유시간을 가진다. 목적 없이 해당 도시를 거닐다 발견한 작은 요소들이 나에게는 큰 영감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 간 곳 중에서는 그리스 이드라(Hydra) 섬의 전직 군인이 운영하는 하우스 뮤지엄, 와일드 클럽을 디자인하기 전에 들렀던 런던의 프라이빗 클럽들이 기억에 남는다. 새로운 걸 보고 배우기를 좋아해서 예상치 못한 하우스 뮤지엄의 우아함, 영국 클럽 문화가 지닌 세련됨이 나만의 스타일로 변환돼 고스란히 프로젝트에 담겼다.


파리의 오텔 데 그랑 부아야죄르(Hôtel des Grands Voyageurs) 베드룸.

파리의 오텔 데 그랑 부아야죄르(Hôtel des Grands Voyageurs) 베드룸.

아름다운 돌고래 석상이 시선을 사로잡는 개인 주택 프로젝트의 가든 디자인.

아름다운 돌고래 석상이 시선을 사로잡는 개인 주택 프로젝트의 가든 디자인.

생트로페의 오텔 라 퐁슈(Hôtel La Ponche).

생트로페의 오텔 라 퐁슈(Hôtel La Ponche).


당신의 우아한 컬러 팔레트를 좋아한다. 최근 컬러 팔레트와 디자인 철학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나에게 컬러는 공간이 말하는 언어다. 그래서 단순한 화이트는 쓰지 않는다. 내가 사용하는 화이트에는 옐로와 오렌지, 테라코타 같은 색을 미묘하게 섞어 넣는다. 오래되고 바랜 듯한 시간의 흔적이 담긴 컬러를 만들어내고 싶다. 나는 이 컬러를 팀원에게 “10년 동안 담배 연기에 찌든 벽의 색”이라고 설명하는데(웃음), 이 독특한 컬러 팔레트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나만의 방식이자 과거의 아름다움을 주저 없이 끌어안으려는 태도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당신의 비전에 영향을 주는 예술가나 건축가, 디자이너가 있나. 과거든 현재든 누구라도 좋다

두말할 필요 없이 빌라 네키를 디자인한 피에로 포르탈루피(Piero Portaluppi)와 프랑스 화가이자 디자이너였던 베르나르 부테 드 몽벨 (Bernard Boutet de Monvel)이다. 이 둘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내게 영감을 준 사람들이다.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공간이나 프로젝트가 있나

더욱더 정신적인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다. 꼭 교회나 절 같은 종교적 공간까지는 아니어도 명상하는 곳 혹은 누군가 자신의 내면세계와 이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 아마도 나에게 그런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웃음).


당신의 작업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면

회색, 어딘가의 중간, 냉철함과 너그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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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컨트리뷰팅 에디터 김이지은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CERRUTI AND DRAIME
  • ROBBIE LAWRENCE
  • ROMAIN LAPRADE
  • VICTOR STONEM
  • COURTESY OF FABRIZIO CASIRAG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