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지극히 사실적이고 개인적인, 스튜디오 언라벨

스튜디오 언라벨 대표 이동일이 밝히는 감각적 공간의 비밀.

프로필 by 윤정훈 2024.06.10
창신동 카페 ‘테르트르’. 직접 디자인한 오브제로 감각적인 공간을 완성했다.

창신동 카페 ‘테르트르’. 직접 디자인한 오브제로 감각적인 공간을 완성했다.

‘언라벨(Unravel)’은 ‘흩트리다’라는 뜻이다. 인테리어 디자인의 관행을 흩트리고 싶은 바람이 담겼다고 디자인 신에서 오랫동안 고여 있던 프레임을 깨고 싶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한국 인테리어 디자인의 정체기를 돌파하고 싶었다.

디자인할 때 컨셉트를 먼저 떠올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대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고 중퇴했는데,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수업방식에 의문이 있었다. 컨셉트를 강하게 정하면 사고가 제한되고 무언가 개입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내 기억과 감정, 지식과 경험이 융합된 디자인을 추구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논리만으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학문으로 정립시키려는 시도다. 개인의 감각이 압도적으로 추출될 때 좀 더 정체성 있는 세계관이 형성된다.

을지로 ‘N/A 갤러리’. 오래된 타일과 바닥을 보존하고, 낡은 창틀을 제거해 금속으로 정돈했다.

을지로 ‘N/A 갤러리’. 오래된 타일과 바닥을 보존하고, 낡은 창틀을 제거해 금속으로 정돈했다.

‘실재하는 것, 감각의 결, 이미지의 권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어떤 뜻인가 어떤 방식으로 창작할 것인가에 관한 태도를 말하고 싶었다. 가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실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감각의 결이 통용되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좋은 이미지가 탄생하면 디자인은 힘을 갖게 된다. 뜻 맞는 예술가들이 모여 미니멀리즘과 인상주의 같은 사조를 만든 것처럼 우리만의 화풍이 곧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대표로서 내 디렉션은 점점 약화시키고 조직 내 모든 디자이너가 힘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다.

마르디 메크르디, 앤더슨벨, 인사일런스, 모노하 같은 브랜드와 꾸준히 협업해 왔다 브랜드들 역시 지속적인 협업을 원한다.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잘 해석해 발전시킨 공간이 쌓이다 보면 그들의 아이덴티티 역시 지속되고, 역사가 축적되니까. 어떤 브랜드의 정체성이 덜 확립됐거나 고객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모를 때 디자이너가 그 막막함을 해결해 줄 수 있다. 좋은 공간을 통해 브랜드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인사일런스 더 현대 서울 스토어. 아니시 카푸어의 반타 블랙으로 고요하고 성찰적인 매장을 만들었다.

인사일런스 더 현대 서울 스토어. 아니시 카푸어의 반타 블랙으로 고요하고 성찰적인 매장을 만들었다.


인사일런스 더 현대 대구 스토어.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는 형태의 오브제로 자연스럽게 제품에 눈길이 가도록 구성했다.

인사일런스 더 현대 대구 스토어.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는 형태의 오브제로 자연스럽게 제품에 눈길이 가도록 구성했다.

쇼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비결이 뭘까 재료의 특성을 잘 편집하는 힘인 것 같다. 우리 프로젝트를 보면 재료 가짓수는 그리 많지 않다. 한정된 재료와 컬러를 쓰되,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다. 브랜드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완전히 새로운 재료나 실험적 디자인은 상업공간에선 현실적으로 어렵다. 작은 차이와 반복, 이를 꾸준히 발전시키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이다.

오브제 역시 일일이 디자인하고 있다. 공간에서 오브제나 가구의 역할을 어디까지 정의하나 작은 공간에서는 오브제로 공간을 구분하고 동선을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오브제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브제가 눈에 띄면 자연스럽게 그 위에 올려진 상품에 눈길이 간다. 벽, 천장, 바닥을 장식하는 인테리어 요소는 공간이 철거되면 쓸모없어진다. 이런 낭비를 줄이기 위한 의도도 있다. 그 비용을 좋은 오브제를 만드는 데 쓰면 효율적으로 공간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다.

마르디 메크르디 롯데월드타워몰. 가드닝 스튜디오 ‘식물의 취향’ 작업실.

마르디 메크르디 롯데월드타워몰. 가드닝 스튜디오 ‘식물의 취향’ 작업실.


협소한 공간에 불투명한 유리로 청량감과 수납을 동시에 해결한 마르디 메크르디 플래그십 스토어의 선반.

협소한 공간에 불투명한 유리로 청량감과 수납을 동시에 해결한 마르디 메크르디 플래그십 스토어의 선반.


앤더슨 벨 압구정 플래그십 스토어. 공간과 제품의 유기적 연결을 꾀한 패션 스토어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 ‘투영’을 컨셉트로 풀어낸 앤더슨 벨 경복궁 스토어 내부.

앤더슨 벨 압구정 플래그십 스토어. 공간과 제품의 유기적 연결을 꾀한 패션 스토어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 ‘투영’을 컨셉트로 풀어낸 앤더슨 벨 경복궁 스토어 내부.

‘르동일워크숍(Ledongil Workshop)’이라는 개인 작업을 병행하며 자유롭고 과감한 오브제를 선보이고 있다. 프리츠한센 150주년 기념 전시와 2023 밀란 디자인 위크 참여뿐 아니라, 스튜디오 프로젝트에 르동일 오브제를 적용하는 등 풍부한 시너지를 내고 있다 예술과 디자인의 모호한 경계를 즐기는 편이다. 물질과 기능에 개인적 감정을 담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LWL’ 조명은 연약한 구조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다. 따로 놓고 보면 불안정하고 연약하지만, 그것을 결합해 단단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내가 느낀 슬럼프나 무력감과도 연결된다. 디자이너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가 많지만, 사실 나는 되게 평범한 사람이다. 집에 오면 널브러져 있고, 귀찮아서 라면을 부숴 먹을 때도 많다. 별 볼일 없지만 가장 나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개인 작업에서만큼은 실재하는 나를 표현하고 싶다. 나의 개인적 감정이나 서사말이다. 오는 10월 N/A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2023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르동일의 개인전 <물질과 기능>.

2023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르동일의 개인전 <물질과 기능>.


프리츠한센 150주년 기념 전시에 설치한 르동일의 ‘LWL’ 조명.

프리츠한센 150주년 기념 전시에 설치한 르동일의 ‘LWL’ 조명.

2016년 스튜디오를 오픈해 올해 9년 차가 됐다.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초기 목표가 생존이었다면, 지금은 여러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효율적으로 높이는 프로세스에 대한 고민이 크다. 내가 없어도 스튜디오가 동일한 퀄리티와 고유성을 갖길 바란다. 어쩌면 가장 멋있는 일 아닐까? 앞서 말한 스튜디오의 슬로건이 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