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알면 알수록 놀라운 생활 명품의 세계 part 1

디자인사에 한 획을 그은 일상 도구들.

프로필 by 윤정훈 2025.09.08

Il Conico Kettle, Aldo Rossi for Alessi, 1986

알도 로시는 상상이나 했을까? 24세기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스타 트렉>에 1986년 자신이 디자인한 주전자가 소품으로 등장하리라는 걸. 우주선에 있어도 전혀 위화감 없는 이 퓨처리스틱한 디자인의 주전자는 ‘일 코니코’다. 주전자를 가장한 작은 건축물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알도 로시는 유럽의 전통 도시 구조와 건축양식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원기둥이나 원뿔, 삼각형 등 매우 단순한 기하를 디자인 요소로 삼아 강렬한 인상의 건축물을 설계했다. 일 코니코에는 그런 알도 로시의 디자인 언어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원기둥 형태의 몸체와 뾰족한 원뿔형 뚜껑, 그와 대비되는 ‘V’자 형태의 주둥이와 ‘ㄱ’자로 꺾여 툭 튀어나온 손잡이는 각기 다른 조형 요소임에도 어딘가 통합된 조각처럼 보인다. 알도 로시의 건축물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토록 원초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오브제 덕분에 누군가에겐 물을 끓이는 일조차 시간 여행이 된다.



Timor, Enzo Mari for Danese Milano, 1967

모더니즘의 질서와 아날로그 감각이 공존하는 다네세 밀라노의 ‘티모르(Timor)’는 데스크 캘린더의 개념을 재정의한 오브제다. 날짜와 요일, 월 이름이 인쇄된 32장의 PVC 플랩을 중심축에 따라 넘겨 갱신하는 구조로, 매년 교체할 필요 없는 영구 달력으로 설계됐다. 엔초 마리는 앞서 벽걸이형 캘린더 ‘빌란시아(Bilancia)’와 ‘포르모사(Formosa)’를 선보였지만, ‘티모르’는 책상 위나 선반에 놓기 좋은 소형 크기와 가벼운 구조로 더욱 일상 가까이 놓였다. 흑백 대비와 헬베티카 서체는 어떤 각도에서도 뛰어난 시인성을 제공하며, 구조도 명료하다. 오래된 기차역의 회전 간판에서 출발한 이 디자인은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사용자의 손길과 함께 시간을 축적해 가는 이 달력에는 “좋은 디자인은 오래가야 한다”는 마리의 신념이 간결하게 응축돼 있다.



EM77, Erik Magnussen for Stelton, 1977

“왜 보온병은 두 손을 써야 할까?” 1975년 에릭 마그누센은 보온병 디자인을 제안받고 생각했다. 그러다 요트의 짐벌식 계측 장비를 보고 기울이면 자동으로 열리고 세우면 닫히는 마개를 고안했다. 장식처럼 보이는 검은색 점은 마개를 분리할 때 누르는 고정 장치로, 제품의 핵심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포인트다. 스틸 본체에 삽입돼 온도를 유지하는 유리 내병은 교체가 가능해 위생적이면서도 지속 가능한 사용을 돕는다. 모든 것이 기능이자 조형인 이 보온병은 덴마크 디자인의 정수를 말없이 증명한다.



AJ Cutlery, Arne Jacobsen for Georg Jensen, 1957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낸 간결한 선과 유기적 곡선 그리고 스테인리스스틸이라는 현대적 소재의 선택은 당시의 은제 커트러리와는 명확히 결을 달리했다. 산업용 소재와 대량생산에 관심이 컸던 아르네 야콥센은 직접 형태를 다듬는 실험 과정을 통해 20년에 걸쳐 이 커트러리를 완성했다. 손잡이와 칼날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 짧은 포크 이빨은 미래지향적 미감을 드러낸다.



Juicy Salif, Philippe Starck for Alessi, 1990

주방 한편에 놓여 있기엔 지나치게 조형적인 존재. 필립 스탁은 알루미늄 보디에 거미 다리 같은 구조를 얹어 주방 도구보다 조각에 가까운 스퀴저를 만들었다. 스탁이 이탈리아 해변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요리를 먹다 종이 냅킨 위에 스케치한 이 아이디어는 효율성보다 조형성과 개념으로 디자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실용과 상징,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넘나든 ‘주시 살리프’는 오늘날까지 알레시의 베스트셀러이자 모마(MoMA) 영구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Aalto Vase, Alvar Aalto for Iittala, 1936

시작은 1936년 카르훌라-이딸라가 주최한 유리 디자인 공모전. 알바 알토는 ‘에스키모 여인의 가죽 바지’라는 제목의 스케치를 냈고, 이듬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이 화병은 큰 주목을 받았다. ‘사보이 화병’이라는 이름은 동명의 레스토랑에서 사용돼 얻은 별칭. 현재까지도 나무 몰드에 입으로 불어 만드는 제작 방식을 따르기에 제품마다 형태가 다르다. 핀란드 호수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도 있는데, 핀란드어로 파도(Aalto)를 뜻하는 이름을 생각하면 아주 무관한 추측도 아닌 듯하다.



Anna G, Alessandro Mendini for Alessi, 1994

멘디니는 몰라도 이 도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웃고 있는 단발머리를 손으로 잡고 돌리기 시작하면 만세를 하는, 마성의 와인 오프너 말이다. 여자친구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건 아니다. 동료 디자이너 안나 길리(Anna Gili)에게서 이름만 빌려왔을 뿐, 디자인적 영감은 멘디니의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촌이 팔을 높이 들어 와인병을 따는데 그 모습이 꼭 발레를 하는 것 같았다고. 흩어질 뻔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붙잡은 결과가 이토록 유쾌하고 근사한 오브제라니!



Wall-mounted CD Player, Naoto Fukasawa for Muji, 1999

끈을 잡아당기면 음악이 새어 나온다. 환풍기 줄을 잡아당길 때 신선한 공기가 흘러 들어오듯 벽을 타고 기분 좋은 선율이 울려 퍼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CD를 보는 재미는 덤. 정사각형 본체와 한 줄의 끈만으로 완성한 CD 플레이어다. “좋은 제품에는 사용설명서가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후카사와의 말은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ET66, Dieter rams & Dietrich Lubs for Braun, 1987

아이폰 계산기 앱의 원형이 된 브라운의 ‘ET66’. 디터 람스와 디트리히 룹스가 설계한 이 계산기는 직사각형 보디 위에 볼록한 원형 버튼을 정돈해 배치하고, 숫자와 기능을 색으로 구분해 명료한 사용성을 제공한다. 숫자는 마모를 방지하는 몰드 방식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의 홈과 고무 패드, 손쉬운 배터리 커버, 슬라이드식 케이스까지 형태와 기능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다.



Moka Express, Alfonso Bialetti for Bialetti, 1933

알루미늄 가공 기술자 알폰소 비알레티는 집에서도 진한 커피를 즐기기 위해 산업 현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손에 착 감기는 주물 알루미늄 팔각형 보디부터 손잡이와 주둥이, 뚜껑까지 기능을 최우선으로 설계했다. 증기압 원리를 단순화해 복잡한 장비 없이도 깊은 맛을 추출할 수 있는 ‘모카 익스프레스’는 아들 레나토 비알레티(Renato Bialetti)가 만든 수염 난 캐릭터 광고와 함께 전 세계 부엌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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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권아름·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