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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하는 산책은 모험이 된다

주간지 <대학내일>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현재는 트렌드 당일 배송 미디어 <캐릿>을 총괄 디렉팅하고 있는 김혜원. 에세이 <작은 기쁨 채집 생활> <나를 리뷰하는 법> 등을 썼다.

프로필 by 윤정훈 2024.11.26

김혜원
주간지 <대학내일>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현재는 트렌드 당일 배송 미디어 <캐릿>을 총괄 디렉팅하고 있다. 에세이 <작은 기쁨 채집 생활> <나를 리뷰하는 법> 등을 썼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산책한다. 홀딱 젖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물놀이하듯 첨벙첨벙 걸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이 있다. “나는 전생에 개였을 것 같아. 주인이 산책을 너무 안 시켜줘서 산책에 목마른 개.” “그럼, 이번 생엔 나랑 같이 산책 실컷 하면 되겠다.”
산책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을 판가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 중 하나다. 산책이 중요한 일정인 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꼭 필요할 때 말고는 굳이 걷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 두 사람이 만나면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견디며 지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 걷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과 만날 땐 혼자 자주 걸었다.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걷는 연인을 보면 쓸쓸해지곤 했다. 같이 걷자고 용기를 내 연락한 적도 있다. 대체로 거절의 답변이 돌아왔다. 피곤하다, 덥다, 바쁘다, 다리가 아프다. 매번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맞다, 여기 구멍이 있었지’라고 깨닫고 그 구멍을 만지고 또 만지면서 혼자 걸었다. 같은 자리를 계속 건드리니까 500원짜리 동전만 하던 구멍이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둘이 하는 산책의 장점은 ‘모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혼자 산책할 땐 ‘큰길 우선 모드’로 걸어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 취향은 한적한 골목길이지만 그런 델 혼자 걸으면 위험하니까. 되도록 환하고 북적이는 곳을 걷는다. 하지만 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상하고 흥미로운 모퉁이를 발견했을 때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게 ‘우리’가 가진 메리트다. “우리 저쪽으로 한번 가볼까?”
낯선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산책은 모험이 된다. 쫄보에게 적합한 안전하고 작은 모험. 새로 사귄 산책 메이트는 꽤 씩씩해서 어둡고 좁은 골목길도 딱히 겁내지 않는다. 대신 긴장해서 굳어 있는 내 어깨를 주무르며 장난을 친다. “쫄지 마. 키 안 커.” 그렇게 낯선 골목을 헤매다 보면 새로운 존재들과 만나게 된다. 근사한 마당이 있는 집, 술 마시기 좋아 보이는 노포, 백 살은 넘었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

“우리 동네에 이런 게 있었는지 몰랐네. 여기 오래 살았는데.” “원래 걸어서 가본 곳까지가 우리 동네야. 점점 넓어지고 있는 거지.” “우리 지난번에 걸어서 창덕궁까지 갔었잖아. 거기도 우리 동넨가?” “그럼, 우리 동네지. 걸어서 갈 수 있으면 다 우리 동네야.”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한강 한 바퀴를 밤새워 걷는 대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여름밤, 한강, 걷기. 내가 좋아하는 모든 걸 모아놨네. 친구들이랑 비밀이나 옛날이야기 하면서 같이 걸으면 너무 낭만적이겠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신청 버튼을 눌렀다. 모르면 용감해진다고. 42km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얼마나 힘들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내린 선택이었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건데 얼마나 힘들겠어.’ 대회를 며칠 앞두고 지난해 후기를 찾아보다가 내가 작은 모험이 아니라 큰 모험을 선택했다는 걸 깨달았다. 발에 물집이 잡히는 건 기본이고 대회를 마치고 일주일 동안 걷기 힘들 만큼 아팠다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잘할 수 있을까? 나 긴장돼서 자꾸 배가 아파.” “쫄지 마. 쫄지 마. 키 안 커.”

두려움을 잔뜩 집어먹고 시작한 모험은 걱정한 만큼 힘들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경험이었다. 초반에는 다 같이 웃고 떠들면서 즐겁게 걸었는데, 25km 지점을 지나면서 다들 체력에 한계가 와서 말이 없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는 듯했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는 사람부터 울기 일보 직전인 사람까지.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30km 지점부터는 속도가 맞는 사람끼리 뿔뿔이 흩어져 각자 걸었다. “힘들 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온다잖아. 누군가의 본모습이 궁금하면 걷기 대회 데려오면 되겠다.” “그렇네.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겠다. 쉽게 포기하거나 과하게 예민해지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과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볼 것 같아.” “(갑자기 상황극 모드로) 잘 걸으시네. 혼자 오셨어요?” “넌 힘들 때도 장난을 치는 타입이구나. 같이 있으면 우울하진 않겠어.”
이번 모험의 트로피는 이 아이인가 생각할 때쯤 결승선이 보였다. 해가 어렴풋이 뜨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마음속을 한 바퀴 걷는 데 11시간이 걸린 것이다.

Credit

  • 에디터 유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정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