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재해가 많이 일어나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을 다니느라 바쁘게 지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지진이 일어난 튀르키예, 모로코, 일본 노토 반도, 얼마 전 큰 불이 난 하와이까지. 요새는 지난해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을 위한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 홍수를 대비해 물 위에 뜰 수 있는 주택을 고안하고 있다.
여주 해슬리 나인브릿지. 작은 단위의 그리드로 구성된 넓은 경관의 지붕은 비용 절감 효과와 자연의 뷰를 선사한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때 지관(종이 파이프)으로 만든 난민 대피소를 시작으로 전 세계 다양한 재난 지역에 저비용으로 빠른 시공이 가능한 임시 건축물을 제안해 왔다. 그때부터 30여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현장을 방문하는 이유가 있나
현장에 맞는 답을 찾기 위해서다. 지역마다 생활방식이나 기후가 천차만별이다.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재료나 적용 가능한 건축 공법이 다르기에 직접 가서 보고 판단해야 한다. 현지 팀을 구성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젠보 세이네이(Zenbo Seinei)’. 일본 아와지 섬에 있는 젠 리트리트 시설로, 아득히 뻗어나가는 목재 구조와 2층에 있는 좌선체험공간이 인상적이다.
가장 힘든 건 역시 정부와의 마찰이다. 가설 주택을 짓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확인 및 허가 절차가 까다롭다. 건축보다 사람과의 싸움이 더 힘든 것 같다.
파머스 레스토랑(Farmer’s Restaurant). 지관과 목재를 결합한 대형 지붕 구조체로 일본 전통 농가의 초가지붕을 연출했다.
‘지속 가능한 도시와 디자인의 역할’을 주제로 DDP에서 열린 서울디자인 컨퍼런스에 참여해 한국형 재난 임시주택 모델을 선보였다
그간 선보여온 임시주택과 비슷한 구조지만,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재를 활용했다. 맥주 운반 상자로 기초를 쌓고 실내 바닥부터 외부 벽까지 한지로 마감한 것이 차이점이다. 방수 기능은 전통 옻칠 기법으로 구현했다.
내부 중정을 중심으로 모든 공간을 방사형으로 배치한 센고쿠하라 빌라.
튀르키예 · 시리아 지진 피해 주민들을 위해 새로운 프로토타입의 임시주택을 내놓기도 했다
이전 버전이 지관 여러 개를 촘촘히 이어 붙여 벽을 세운 것이라면, 새로운 버전은 1.2m마다 배치된 지관 사이에 나무 패널 벽을 넣는 방식이다. 시공 방식이 훨씬 간단하고 빠를 뿐 아니라 내구성도 한층 높다.
DDP에서 선보인 한국형 재난 임시주택과 반 시게루, 후지산 세계유산센터.
임시주택인데 내구성을 계속해서 보완하는 이유는
임시주택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나 정부이지 건축가의 몫은 아니다. 따라서 몇 번 사용하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 살 수 있는 건물을 짓는다. 내가 만드는 것이 가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일례로 2001년 인도에 만든 종이 주택은 당시엔 임시 거주용이었지만 지금도 남아 있으며 현재는 지역 진료소로 사용되고 있다.
DDP에서 선보인 한국형 재난 임시주택과 반 시게루, 후지산 세계유산센터.
당신의 몇몇 작업 중 공통적 특징이 다양한 지붕 형태와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건축의 기본은 지붕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요소는 기후나 장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지붕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지붕을 다양한 방식으로 개발해 왔다.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유는 제대로 하기 위함이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이 많은데, 엉망진창인 구조를 숨겨 디자인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 건 건축이 아니다. 앞으로 건축 분야에서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장인 정신이다.
DDP에서 선보인 한국형 재난 임시주택과 반 시게루, 후지산 세계유산센터.
우크라이나에 병원을 건설하는 일이다. 르비우(Lviv)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로, 비교적 전쟁으로부터 안전해 많은 부상자와 피란민이 몰려 기존 병원의 수용력이 한계에 달했다. 도시 복구 프로젝트차 방문했는데, 르비우 시장으로부터 병원의 증축 설계를 요청받았다. 우크라이나에는 동유럽에서 가장 큰 CLT(Cross-Laminated Timber) 공장이 있는데, 전쟁으로 수출이 막혀 남은 자재를 활용하자는 제안이었다. 현재 사무소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많다. 직원들이 있어 내가 일일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는 내가 주도하지 않으면 성사되기 쉽지 않다. 내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그 외는 스케치 정도만 하는 편이다.
지진 피해 지역에 종이로 만들어 세운 라퀼라(L’Aquila) 임시 콘서트홀 내부.
재활용 가능한 목재로 지속 가능한 건축의 가능성을 밝혀왔다. 퐁피두 메츠 센터, 후지산 세계유산센터, 스와치 & 오메가 캠퍼스 등 대규모 건축물로 목재의 한계에 도전했는데, 아직 이뤄보지 못한 게 있을까
재료마다 적절한 쓰임새가 있기 때문에 목재가 더 낫다, 콘크리트가 더 낫다고 말할 순 없다. 가령 초고층 빌딩에 목구조를 적용하는 건 아직 적합하지 않다. 나는 건축에 대해 특별한 목표를 세우고 있지 않다. 딱히 인생에 대한 목표도 생각하지 않는데 목구조에 대한 목표가 있을 리 있겠나(웃음).
튀르키예 · 시리아 지진 피해 지역 대피소에 세운 종이 파티션 시스템.
성당, 미술관, 엑스포 전시관 등 다양한 공공건축물을 설계해왔다. 그중에서도 오이타 현립미술관은 공공건축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한 프로젝트다. 공공건축을 향한 인식을 높이려 할 때 건축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평소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마음 편하게 찾는, 가족적이고 사랑받는 공공건축물을 만들고 싶다.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아직까지 공공건축물이 세금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세금으로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자부심과 애정이 없으니 금방 부수고 다시 짓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오이타 현립미술관은 건물을 최대한 오픈된 환경으로 조성해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한 사례다. 비개방적인 건물은 시민과 선으로만 접점을 가진다. 그래서 전면에 완전 개방이 가능한 접이식 유리문을 둔 것이다. 문을 열어젖히면 미술관과 마을 사이에 중간 지역이 형성된다. 이로써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목재로 유기적 구조를 구현한 스와치 & 오메가 캠퍼스.
재난 건축, 인도주의 건축가, 프리츠커 수상자 등 반 시게루를 향한 세간의 평가가 당신에게 주는 영향은
일종의 자신감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만든 종이 주택으로 마이니치 디자인상(Mainichi Design Prize)을 받았는데, 건축상은 아니지만 당시 내가 일본에서 무척 존경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젊은 시절에 받았던 상이다. 고베 프로젝트를 마치고 너무 지쳐 ‘다시는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앞으로도 계속하라는 격려처럼 들렸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세운 종이 성당은 2008년 지진 피해를 입은 대만으로 이전됐다.
사무소를 설립한 이래 38년이 지났다. 작은 것부터 큰 것, 재해 지역부터 도심까지 규모와 유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당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건축은 어떤 형태일까
글쎄, 지금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알다시피 나는 건축적 목표가 없는 사람이다. 큰 빌딩이나 역사에 남는 랜드마크를 만드는 데 큰 관심이 없다. 다만 부단히 나를 훈련한다. 사람이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면 변질되기 쉽다. 다른 이의 의견을 잘 듣지 않거나, 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다. 나도 젊은 직원에게 일을 다 맡기면 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길 원하지는 않는다. 큰 건물을 짓는 것도, 재난 현장에 가는 것도 모두 나를 훈련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은 없다. 내가 아닌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을까?
2011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피해 주민을 위해 만든 종이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