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가 왜 이런 묘비명을 썼는지 그리스에 다녀오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테네 외곽 마을에서 맡은 싱그러운 레몬나무 열매와 풋풋한 잡목의 내음, 플라카 지구를 돌아다니다 코끝에 스친 피스타치오 절임의 달큼한 향, 이 모든 걸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던 바람과 태양까지. 에르메스 ‘운 자르뎅 아 시테르’는 이 모든 공감각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향이다. 뿌릴 때마다 그리스에서 느낀 황금빛 정취가 선연하게 떠오른다. 파르테논 신전과 주변 풍광을 떠올리며 일부만 남은 돌기둥 위에 찬란했던 당시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여유롭고 풍요로우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자유로운, 그리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떠올라 단 한 번의 방문이었을 뿐인데 늘 그곳이 그립다. 언젠가는 꼭 다시 가고 싶다는 갈증 어린 희망사항을 품은 채 매일 에르메스 향수를 뿌린다.
뷰티 디렉터 정윤지 운 자르뎅 아 시테르 오 드 뚜왈렛, 50ml 12만8천원, 100ml 19만5천원, Hermès. 「 Sehwa Beach, Jeju Island
」 ‘여름’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2021년 제주도 세화에서 보냈던 시간이 조건반사처럼 떠오른다. 매우 특별했던 친구와 함께한, 바닥까지 보일 만큼 맑은 바다와 골목골목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반겨주던 그곳. 오토바이를 타고 함께 해안도로를 달렸을 때 바람결을 타고 날아온 그의 향기가 좋았다. 바다 내음과 어우러져 비릿하면서도 청량했고, 드라이브하며 스쳐 지나간 들꽃의 달콤한 잔향 같기도 했다. 당시 그가 뿌렸던 향은 바로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아쿠아 유니버셜 코롱 포르떼 오 드 퍼퓸’. 여행하는 내내 이 향수를 함께 뿌리곤 했다. 그러다 제주에 태풍이 상륙했지만, 향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쏟아지는 폭우에도 우산 없이 뛰어다니며 춤추고 노래했던 기억이 선하다. 비에 젖어 더욱 투명하고 순수하게 빛나던 그 여름의 공기 냄새가.
뷰티 에디터 김하늘 아쿠아 유니버셜 코롱 포르떼 오 드 퍼퓸, 35ml 18만3천원, 70ml 28만8천원, Maison Francis Kurkdjian. 영국의 작은 마을 배스(Bath)에 교환 학생으로 갔던 2010년 여름. 펜할리곤스 ‘사보이 스팀’은 그곳에서 느꼈던 뜨끈한 열기와 향, 생경한 공간의 두려움과 잘해보고 싶었던 의지를 선명하게 일깨운다. 배스는 실제로 온천수가 나오는 지역으로 물 냄새와 여름의 열기가 결합해 특유의 쿰쿰하고 매캐한 향이 나곤 했었는데, 사보이 스팀의 스파이시하면서도 스모키한 향기가 매우 비슷하게 느껴진다. 향을 맡을 때마다 증기로 가득한 온천 탕에 몸을 담근 채 온전한 휴식을 즐기는 느낌이 든다. 특유의 뿌연 향취가 나를 23세의 여름으로 이끈다. 기숙사 창문으로 보이던, 영국 시대극에서나 나올 법한 광활한 뒤뜰과 연못, 친구가 머물던 집에 놀러 갔을 때 주인 할머니가 만들어준 영국식 홍차, 치열하게 노력했던 아침 문학 수업….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썼던 여름날의 기억으로 말이다.
뷰티 에디터 김선영 사보이 스팀 오 드 퍼퓸, 100ml 28만6천원, Penhalig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