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하반기에 접어든 지금,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심지어 마스카라까지!)에 양 볼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인 남자 아이돌의 모습을 봐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남성 메이크업에 대한 생각의 온도가 변한 것이다. 2019년 초대박을 터트린 베네피트의 ‘하성운 틴트’ 이후 다양한 뷰티 브랜드가 남자 아이돌과 비주얼 작업을 진행했다. 결과는? 100%의 성공률을 자랑한다. 클리오는 ‘매드 매트 스테인 립’ 출시와 함께 업텐션 김우석의 비주얼이 담긴 한정판 아이템 증정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판매량이 전일 대비 무려 20배 가까이 치솟았고, 지방시 뷰티는 강다니엘과 촬영한 화보 컷이 공개되자마자 매장에 “우리 오빠가 바른 립스틱 있어요?”라는 문의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다. 이런 상황은 뷰티 브랜드 모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샤이니 태민은 얼마 전 발매한 정규 3집 티저 이미지에서 수줍은 듯 서정적인 오렌지 블러셔를 진하게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음악에 맞춰 메이크업도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볼에 톤다운된 오렌지빛 블러셔를 더해 연약한 무드를 극대화했죠.” 그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김주희 실장은 단조로운 남자 메이크업에 ‘색’을 더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해리 스타일스는 ‘워터멜론 슈가’ 뮤직비디오에서 파우더 핑크 네일을 바르고 나왔고, 이후 각종 공연에서 알록달록한 네일 컬러를 칠하고 등장했다. 샤넬 뷰티의 남성 메이크업 라인에서도 네일 폴리시를 출시했으니, 이제는 남자들이 네일 컬러링을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메이크업에서 ‘젠더리스’는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젠더-프리’를 외치는 다양한 뷰티 브랜드가 등장했고, 최근 메이크업 라인을 론칭한 바이레도도 모든 제품을 ‘젠더리스’ 아이템으로 구성했다. 규칙과 제약 없이 개개인의 주관과 본능에 따라 제품을 사용하라는 거다. 많은 남자가 메이크업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회는 이런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당장 옆자리에 앉은 남자 동료가 퇴근 전에 쿠션을 얼굴에 두드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남자들이 점점 더 과감한 화장을 즐긴다면, 여자들은 오히려 색을 덜어내는 추세다. 〈이태원 클라쓰〉로 눈길을 사로잡은 배우 이주영은 극중에서는 물론 실제 모습도 털털하고 중성적인 메이크업을 추구한다. “주영 씨는 공식석상에서도 화장을 자연스럽게 하는 걸 선호해요. 인조 속눈썹이나 아이라인을 그리지 않고, 본인의 눈매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아이 메이크업을 마무리하죠. 중성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눈썹 모양을 잘 잡으려 해요. 너무 남성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여성스럽지도 않게요.” 그녀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아우라뷰티 정보영 부원장의 설명이다. 배우 정유미는 머리를 쇼트커트한 뒤 거의 모든 공식석상에서 메이크업을 진하게 하지 않는다. 〈82년생 김지영〉 때도 그랬고, 얼마 전 종영한 〈보건교사 안은영〉 제작 발표회에서도 입술에 은은한 혈색을 주는 정도로 메이크업을 마무리했다. 뷰티 브랜드의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모델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중인 엘러브(L’Love)는 전형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모델 정소현, 박희정과 광고를 촬영했다. “기존 뷰티 시장에서 추구하던 ‘여성성’과 ‘화려함’보다 성별을 넘어 남성과 여성의 미묘한 조화 속에서 균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과 작업하고 싶었어요.” 엘러브 박지영 팀장은 두 모델과 촬영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틸다 스윈턴부터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리고 중성적인 마스크로 남성 브랜드 모델로도 활동하고 최근 영화 〈빌로우 허〉로 스크린에 데뷔한 에리카 린더까지!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샤스와 아크리스, 이자벨 마랑, 롱샴 등 다수의 쇼에 중성적인 메이크업 룩을 한 모델들이 대거 등장했으니. 여기서도 핵심은 눈썹이다. 너무 진하지도, 그렇다고 서양 특유의 아치를 과도하게 살린 형태가 아닌, 눈썹 한 올 한 올을 섬세하게 살린 풍성한 셰이프를 연출하는 게 관건이다. 포마드로 헤어를 슬릭하게 넘긴 모델들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발망과 로에베가 대표적. 화장은 더 이상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배우와 뷰티 브랜드, 런웨이의 이런 행보는 결과적으로 여성의 선택지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