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경상남도 창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는지?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한 경비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비극 말이다. 그로부터 4년 후 2014년 10월엔 역시 입주민의 일방적 괴롭힘에 압구정 한 아파트의 경비원이 차 안에서 분신 기도를 했고 투병 중 그해 11월 7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6년여가 지난 지금, 정확히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 2020년 5월 10일 강북의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 사건. 사회는 분노했다. '갑질 소비자 처벌법' 등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고인의 죽음이 갑질과 폭력에 의한 것인 만큼, 사회적이고 법적인 보호망이 갖춰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맞는 얘기다. 갑질의 비극은 이미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2013년 서울 청량리 롯O백화점 여직원이 매출실적 압박을 견디다 못해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2018 자동차 하청업체 대표가 원청의 단가 후려치기와 같은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말이지 갑질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은 예까지 포함하면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도대체 왜? 무슨 권리로 그들은 백화점 직원을 무릎 꿇게 만들고, 보안 직원의 뺨을 후려치며, 버스 기사에게 욕설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VIP이고 손님이기 때문에?
갑질: 자신의 우월한 지위와 권력을 악용해서 가혹한 행위를 하는 것. JTBC 뉴스룸
사람들은 ‘갑질’이 한국만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굳이 찾자면 괴롭힘인 ‘bullying’이나 권력 남용의 의미인 ‘power abuse’, 노예의 상태나 제도를 뜻하는 ‘slavery’ 정도? 2018년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갑질’이라는 단어를 ‘gapjil’로 표기하며 지난 2014년 발생한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갑질’의 의미에 대해, 봉건 사회의 영주처럼 행동하는 간부들에 의한 부하직원과 하청노동자 학대를 보여주는 행위(the abuse of underlings and subcontractors by executives who behave like feudal lords)라는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적절한 영어단어가 없다고 해서, 외국에는 갑질이 없을 거라는 추측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갑질, 그러니까 사회, 경제, 권력 지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차별은, 모든 사회 공통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70만부 판매된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스틸
런던에서 나고 자라면서 경험했던 갑질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의 왕가 자녀였던 중학교 친구의 집에 몇 차례 방문했을 때 그 친구가 어머니 나이뻘 되는 메이드에게 고함치는 모습을 목격했다. 평소 학교생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면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잠시 부자들을 위한 와인 웨이터로 일했을 때도 일부 고객들의 갑질로 인해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방글라데시 사람이다 보니 가끔 친척 방문을 위해 방글라데시에 가곤 했는데, 그곳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하인의 숫자가 곧 그 가족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곳에서 갑질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어이가 없네?" 갑질 영화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베테랑〉 스틸
하지만 한국에서의 갑질은 다른 나라에서 경험했던 갑질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갑질’은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지만 모든 사회 영역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또한 ‘갑’과 ‘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위치가 유동적이며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평범한 생활을 하는 일반인도 일상에서 갑질을 경험하거나 갑질을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 〈카트〉 스틸. 영화 속 대형마트 비정규직 계산원들은 매일 아침 이 구호를 선창한다. ’손님은 왕이다, 고객 감동 서비스! 사랑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한국에서 갑질은 돌고 돈다. ‘내리 갑질’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을의 시간’을 버텨온 사람들의 보상 심리일까?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는 상급자로부터 각종 갑질을 당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고객사의 각종 불합리한 요청에 예스맨으로 응대해야 하며 업무는 그대로 실무자들에게 전가 된다. 갑질은 회사에서는 높은 직급에서 낮은 직급으로, 군에서는 선임에서 후임으로, 대학에서는 교수에서 학생으로, 선배에서 후배로, 법조계에서는 높은 기수에서 낮은 기수로 전달된다. 종교계, 기업, 의료계, 엔터테인먼트, 언론매체, 공무원, 정치인, (대)학교, 법조계, 스포츠계…. 그동안 뉴스로 접한 갑질 사례를 대충 훑어만 봐도 갑질 문화가 없는 영역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리고 이런 갑질 문화는 회사나 기관의 경계를 넘어서서 전혀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뻗어 나간다.
땅콩 회황을 예언했던 걸까? 영화 〈롤러코스터〉의 스틸
수치화하기는힘들지만, 갑질의 기반이 되는 조직 내의 명확한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의 절차는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이뤄낸 한국의 급격한 경제발전의 동력은 배금주의, 성과주의, 집단주의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회경제적 성공이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설정된 사회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는 장애물이다. 돈과 성공으로 매개 되는 인간관계에서, 인간성보다는 효용성과 실익이 우선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발생한 A 제약회사 수행기사 폭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접전: 갑을전쟁〉 스틸
내가 경험한 회사 생활은 경쟁의 연속이었다. 그 안에서 생존과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타인을 차별해 그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갑질은 타인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외부에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깔려 있다. 내가 관찰한 갑질은 가해자가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이 타인에게 투영되는 과정이다. 결국 갑질은 약자를 공격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타인보다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는 나약함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을’에게 폭언과 폭행, 착취를 일삼은 인간들은 VIP가 아니고 그냥 열등감에 찌든 비겁자일 뿐이다. 그런데 잠깐. 기성세대가 그렇게 원했고 노력했고 결국 이뤄낸 물질적 풍요와 경제적 성공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인간다운 삶 아니었던가? 비겁자의 삶이 아니라.
*한국 살이 9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