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자들의 신상을 털고 협박해 ‘성노예’로 삼는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가해자 전원 신원 공개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은 순식간에 200만 명을 기록했고, 정부와 사법부는 수사와 처벌을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내 주변의 많은 남성도 이 사건에 분개했다. 다행이다 싶은 반면, 낯설었다. 아니, 이 26만 명만 문제라고? 한국 사회 자체가 이미 거대한 N번방 아니었나? 갖가지 ‘야동’과 메신저로 오가는 영상들, 음담패설과 룸살롱 문화로 이뤄진 남성 카르텔을 진심으로 혐오하고 비판하는 남성을 나는 많이 알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성범죄자들을 향해 ‘그래도 괜찮다’는 관대한 메시지를 끝없이 보낸다. 성관계 동영상을 빌미로 삼은 협박에 용감하게 맞선 여자 연예인 대신 가해자의 편을 들고, 성접대를 받은 전 법무부 차관은 공소시효를 빌미로 풀어주는 걸 본다. TV 출연진이 ‘야구 동영상’ 타령을 하며 낄낄대고 그토록 떠들썩했던 버닝썬 게이트의 중심에 있었던 이가 평온하게 입대하는 것, N번방 사건이 불거질 때조차 과거 미성년자 성매매를 한 남자 가수의 노래가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는 것을 본다. 장자연 사건 관계자들이 아닌, 진상을 밝히려고 애쓰던 여성 동료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12세 지적장애 아동을 강간한 남성들이 아이에게 사준 ‘떡볶이’가 화대로 인정돼 풀려나는 것을 본다. 수많은 데이트 폭력범, 성폭행범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미래가 유망해서, 가정이 있어서 같은 이유로 감형 받는 것을 본다. 수많은 범법 행위가 남자에게는 ‘오죽했으면’으로, 여자에게는 ‘쟤도 문제가 있겠지’로 귀결되는 것을 본다. 여론이 조금 잦아들자 지금 N번방 피해자들을 향해 ‘그러게 왜 그런 사진을 찍었냐’는 비난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절반인 성별을 비난하는 건 지치는 일이다. 어쨌든 앞으로도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기에 더욱 그렇다. 수십 권의 저서를 펴낸 사회운동가 벨 혹스의 책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은 남녀가 함께 ‘가부장제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장 자체는 새롭지 않으나 ‘성적 존재로서의 남성’에 대해 할애한 챕터는 흥미롭다. 여러 남성 필자들의 글을 인용하며 가부장제가 ‘강간 문화’에 어떻게 동조하는지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사랑과 감정의 교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남성이 활발한 성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강조한다. 남성에게 성관계는 지배하는 쪽과 순종하는 쪽이 있다고 가르친다. 현대사회에서 섹스는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약속한 ‘지배’를 가장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섹스로 대체될 것을 요구 받으며, 그래서 남성은 ‘싫다’고 말하는 여성에게 분개한다.
코로나 시대에도 성매매 업소 한 군데를 하루에 수백명이 드나드는 게 정말 그놈의 성욕 때문일까? 룸 안에서 이뤄지는 상하관계, 상대 여성을 굴복시키고 모욕하는 데 초점을 맞춘 수많은 야동의 서사, 지인능욕 사진과 불법촬영물, 그리고 N번방의 운영 방식은 가부장제의 지배와 폭력, 복종의 문화를 실현한 것에 가깝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쩐지 나와 가까웠던 남성들이 떠올랐다. 자꾸 ‘골뱅이 있다’는 문자가 와서 추궁하니 친구들과 헌팅 포차에 간 적 있음을 고백했던 A(덕분에 골뱅이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여성을 가리키는 은어임을 알았다), 지방에서 친구가 올라온다며 “청량리 588 구경시켜 줘야지”라고 해맑게 말하던 B(실제로 가지 않았지만), 군대 선임들이 ‘사창가에 데려가줬다’던 C(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해도), 컴퓨터에 연예인의 불법촬영물 영상을 갖고 있던 D(지금은 삭제했길 바란다)…. 이들이 이상하고 유별난 사람일까? 아니, 나와 친밀했기에 이런 모습까지 들켰을 뿐 평균 이상으로 다정하고, 진보적이며, 비교적 덜 가부장적인 사람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가부장제의 남성성에 편입되고자 ‘센 척’하고 침묵하는 쪽을 택한, 아주 일반적인 남자들이었을 뿐.
N번방 사건 주요 운영자의 80% 가까이가 10~20대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여성들이 느끼는 절망과 좌절은 상상을 초월한다. 세대가 바뀌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강간 문화가 더 새롭고 교묘하게 진화했다는 것. 젊은 여성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소라넷 폐쇄와 불법촬영물 반대를 외치고, 여대생 두 명으로 이뤄진 ‘추적단 불꽃’이 N번방의 존재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언론에 알리는 동안 또래의 남성들은 가해자가 되거나 방관했다는 것. 그런 이들의 삶이 앞으로도 안녕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것. 조주빈 재판에 원래 배정됐던 판사의 자질을 의심하며 바꿔달라는 이례적인 요구가 반영된 것 또한 이 강력한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N번방 사건’과 연루된 모든 이가 강도 높게 처벌받기를, 그래서 그 방에 있던 26만 명과 ‘선 긋기’를 시도한 남성들이 정말 가부장제의 강간 문화에서 멀리 벗어나야겠다는 경각심을 갖길 바란다. “사람들이 N번방 사건을 보면서 초유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검사로 근무하면서 온갖 종류의 끔찍한 성폭력 사건들을 접했습니다. 일베, 소라넷에서 동일한 또는 유사한 범죄들이 셀 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제대로 처벌받았나요?” 서지현 검사의 질문처럼 우리는 이 끔찍한 굴레를 멈출 수 있는 출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