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동’이라는 거대한 합의
」다만 막역한 친구에게 ‘야동’의 보편적 서사를 전해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몹시 이상했다. 그가 가끔씩 소비하던 야동은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상업 포르노였던 모양이다. 그에 따르면 서사는 세팅이 전부다. 직업적 상황일 때도 있고, 사회적 맥락일 때도 있으며, 아주 일상적이거나 특수한 상황도 있다. 어쨌거나 종국에는 섹스. 상세한 각종 설정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이걸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만나는 여성을 멀쩡한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속이 거북했다. 불특정 다수를 그 정도로 구분하지 못하는 미숙한 사람 취급을 하고 싶진 않다. 심지어 이건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불쾌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총기 사고의 책임을 게임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발언이니까.
그런데 난, 그럴 것 같다. 간밤에 ‘간호사가 나오는 영상’을 보고 병원에 갔다면 눈앞의 간호사를 보며 어젯밤 영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영상을 봤다고 한들 떠오르는 이미지를 애써 억누르고 눈앞의 ‘사람’에게 상상으로라도 실례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며, 대다수가 그 정도 상식은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런 걸 일상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게 상업 포르노라 할지라도 그렇게 온갖 상황과 맥락에서 충분한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는 영상을 보고 있다면, 일상에서 만나는 여성을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정말 가능할까? 내가 미숙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안 될 것 같다. 그저 ‘궁금하지 않을 뿐’이었던 것이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된 이유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분류하는 수사를 싫어한다. 세상의 수많은 개인이 그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해당사항이 너무 없어서 들을 때마다 짜증난다. ‘남자는’으로 시작하는 말 중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덕분에 남중 · 남고 · 군대를 거치면서도 또래 집단에 깊이 섞여본 적 없다. 그렇다고 나는 여자도 아니다. 그 사이 사각지대에서 어딘가 살아 왔다. 그럼에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중에는 남자도 여자도 있다. 그러나 ‘N번방 사건’ 같은 대규모 성범죄 문제가 터지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남자라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야동’을 한 번도 안 본 것을 믿어주지 않을 만큼 수많은 남자가 당연하게 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에는 꽤 정의롭다고 자부하는 남자들이 ‘OO녀 동영상’ 링크를 주고받는 장면도 종종 보았다.
일상에서 나와 마주치는 여자들은 내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겉으로 사람 좋게 웃고 있어도 뒤에서 뭘 보고 있을지 그들이 어떻게 알까. ‘야동’이 그토록 당연한 문화라는데, 그 ‘야동’의 정체가 이토록 미심쩍은 세상에서 모든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잠재적 가해자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끔찍해지는 순간이다. N번방 주동자가 구속돼도 보란 듯이 ‘성욕은 본능’이라며 소리치는 남자를 보며 환멸을 느낀다. 식욕도 본능이다. 그렇다고 식당에서 남의 숟가락을 빼앗지는 않는다. 배설욕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본능이다. 심각한 설사를 버스에서 참지 못했다면, 누구나 최소 부끄러워는 할 거다. 그럼에도 못 푼다고 죽지도 않는 그놈의 성욕은 뭐가 그리 잘나서 타인을 해치면서까지 본능을 외치는가. 그건 그냥,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너한테는 그래도 되니까. 너무 많은 영상에서 그래왔으니까.
내 폰에 남자들만 있는 단체 채팅방은 딱 하나 있다. 오랜 교회 친구 대여섯 명이 있는 곳이자 내 유일한 ‘남성 또래집단’이다. 대부분 성실한 남편이자 아빠이고, 단톡방에는 아기나 일 이야기 말고는 눈살 찌푸릴 어떤 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나는 이 방의 친구들 모두 오롯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만, 이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어떤 사람일지 솔직히 모른다. 어쩌면 이 방에서만 아닌 척하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이 방’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합의가 있다는 사실이다. ‘OO녀 동영상’ 이야기 같은 걸 하면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는, 이런 합의가 남자끼리 모인 곳마다 늘어야 한다. ‘야동은 당연히 다 보는 거’ 같은 합의 말고. 잠재적 가해자 소리가 그렇게나 듣기 싫다면 말이다. 권성민(예능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