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대신 플래티넘? 주얼리의 새로운 키워드
금값이 치솟은 올 한 해, 주얼리 시장은 의외의 답을 발견했다. 오래된 듯하지만 새롭고, 묵직하게 순백의 빛을 뿜어내는 플래티넘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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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플래티넘 소재의 ‘벨 에포크 브라이덜’ 밴드는 DAMIANI. 허니콤을 모티프로 한 플래티넘 소재의 ‘비 드 쇼메’ 링은 CHAUMET. 2개의 밴드가 합쳐진 형태의 ‘콰트로 레디언트 에디션 웨딩’ 밴드는 BOUCHERON.
“혹시 다른 소재로도 가능할까요?” 요즘 주얼리 매장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질문이다. 올해 들어 금값이 크게 오르면서 고객들이 하나둘 다른 선택지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금을 대체할 만한 해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플래티넘이다.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 플래티넘 주얼리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수년 만의 보기 드문 상승세라고 평가한다. 전통적으로 금만 고집했던 중국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플래티넘 주얼리 가공량이 늘고 있고, 중국 최대 주얼리 도매상가인 선전의 수이베이에 올해 들어 플래티넘 전문 쇼룸이 10개나 새로 문을 열었다. 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플래티넘이 다시금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하이 주얼리, 플래티넘으로 빛나다
」티파니의 움직임이 특히 눈에 띈다. 상징적인 6 프롱 세팅과 T 컬렉션에서 플래티넘 옵션을 꾸준히 제공해온 브랜드답게, 최근에는 블루 북 컬렉션에서 플래티넘 소재에 대형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를 세팅한 작품들로 화제를 모았다. 장 슐럼버제의 ‘버드 온 어 락’ 컬렉션도 플래티넘과 18K 옐로 골드의 조합으로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불가리는 세르펜티와 매그너스 컬렉션 등 대형 하이 주얼리 피스들을 플래티넘 소재로 선보이며 브랜드의 대담한 스케일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올해 핫한 키워드는 단연 ‘믹스 메탈’. 쇼메는 ‘뱀부’ 캡슐 컬렉션에서 플래티넘과 옐로 골드를 과감하게 믹스해 자연주의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루이 비통 역시 하이 주얼리에서 플래티넘을 단일 소재로 선택하고, 동시에 바이컬러 조합을 선보이며 스타일링의 선택지를 넓히고 있다. 플래티넘과 골드의 믹스는 하이 주얼리 세계뿐 아니라 일상 속 레이어드 스타일에서도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
웨딩 링의 새 주인공
」럭셔리 브랜드들과 함께 웨딩 시장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 시장에서 플래티넘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주얼리 디자이너 제이드 트라우는 지난 2년간 변화를 체감했다고 한다. 화이트 메탈을 찾는 고객이 서서히 늘었고, 특히 웨딩 링을 중심으로 플래티넘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설명이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가격 역전이 있다. 과거 플래티넘은 금보다 비쌌지만 지금은 오히려 저렴하다. 금은 수천 년간 화폐이자 투자 수단으로 쓰이며 안정적인 자산으로 자리 잡았지만, 플래티넘은 산업적 성격이 강해 경기 침체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금에 비해 상승 폭은 제한적이었다. 덕분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면서 차별화된 선택지가 되었다. 하지만 플래티넘의 매력은 비단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제이드에 따르면 화이트 골드는 시간이 지나면 금색이 비쳐 보이는 반면, 플래티넘은 근원적으로 하얀 금속이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더라도 순백색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 게다가 금보다 밀도가 높아 손에 착 감기는 특유의 묵직한 느낌에서도 차이가 있다. 피부에 닿을 땐 차갑지만 곧 체온에 녹아드는 느낌이다. 내구성도 탁월하다. 순금보다 단단하고 변색과 부식에 강하다. 플래티넘은 저자극성 금속인 데다 보통 90~95%의 고순도로 제작해 금속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안심하고 착용할 수 있다. 이런저런 설명보다 강력한 건 경험이다. “플래티넘을 착용하는 순간 고객들은 금과 다른 무언가를 느껴요. 묵직함이 주는 안정감이죠.” 제이드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동시대적 가치를 담은 금속
」플래티넘은 이미 수백 년 전, 잉카 문명 장인들의 손끝에서 다뤄졌던 금속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플래티넘이 공식적인 무대에 오른 것은 18세기 중반의 일이다. 1786년 루이 16세의 금세공사가 순백색 플래티넘 설탕 그릇을 완성했고, 플래티넘을 ‘왕을 위한 금속’이라 불렀다. 왕족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희소성과 순백의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다. 플래티넘의 황금기는 벨 에포크 시대다. 파리 살롱을 오가던 귀부인들의 목과 손에 플래티넘 주얼리가 걸려 있었고, 그것은 다이아몬드의 눈부신 광채와 백진주의 은은한 빛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플래티넘의 순백색이야말로 보석 본연의 아름다움을 방해하지 않는 완벽한 캔버스였다. 이때 확립된 플래티넘과 다이아몬드, 백진주의 조합은 지금까지도 클래식 주얼리의 바이블로 남아 있다. 과거의 영광을 이어 플래티넘이 또 한 번 재발견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연초 온스당 896달러에서 시작해 9월 9일 기준 1392달러로 플래티넘 가격이 약 55% 뛰어올랐다. 금값 급등으로 소비자들의 시선이 다른 금속으로 옮겨가면서 플래티넘 본연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MZ세대에게 플래티넘은 더욱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간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순백색, 섬세하면서도 견고한 세공이 가능한 뛰어난 가공성, 높은 순도로 인한 안전성까지, 이 모든 특성은 지속 가능한 소비를 추구하는 이들의 가치관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빠르게 소비하고 버리는 대신, 오래 쓸 수 있는 것에 투자하려는 세대의 철학이 플래티넘과 만난 것이다. 남성 주얼리 시장의 변화도 흥미롭다. 젠더리스 패션 트렌드와 맞물리며 플래티넘의 중성적 이미지가 새로운 매력 포인트가 되고 있다. 결혼반지와 시계에 국한됐던 남성 플래티넘 주얼리가 브로치, 커프 링크스, 목걸이, 이어링까지 확장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플래티넘을 즐기는 방법
」플래티넘 입문자라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 것. 심플한 밴드 하나면 충분하다. 플래티넘 특유의 무게감과 질감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플래티넘은 섬세한 디테일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교한 세공이 돋보이는 클래식한 디자인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스타일링에 변주를 주고 싶다면 서로 다른 텍스처의 플래티넘 링을 여러 개 겹쳐 끼거나 골드와 믹스한 스타일링을 시도해보자. 플래티넘의 순백색은 어떤 금속과도 조화를 이루고, 특히 옐로 골드와의 콤비네이션에서 세련된 대비를 이룬다. 플래티넘은 부활이 아닌 재발견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단순히 금의 대체제가 아니라 본연의 매력과 동시대적 코드를 담고 있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피부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묵직함,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순백의 빛깔, 여기에 정교한 세공이 가능한 뛰어난 물성까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플래티넘 그 자체의 매력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의 손과 목에서 플래티넘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writer 윤성원(주얼리 스페셜리스트,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교수)
Credit
- 에디터 김효정(미디어랩)
- 글 윤성원
- 사진가 정우영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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