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이광호 작가의 제주 유니버스 2

감각의 실험장이 된 도시 속 기지와 다섯 식구의 삶을 품은 집.

프로필 by 이경진 2025.10.16
거실에서 주방까지 이어지는 조명은 잉고 마우러의 ‘야야호(Yayaho)’. 다이닝 테이블과 체어는 모두 아르텍.

거실에서 주방까지 이어지는 조명은 잉고 마우러의 ‘야야호(Yayaho)’. 다이닝 테이블과 체어는 모두 아르텍.

포트가 무계획의 실험에 가까운 프로젝트였다면, 포트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이광호의 집은 치열한 계획과 조율로 이룬 사적인 쉼터다. 아이 셋과 아내 그리고 이광호까지 다섯 식구가 함께 사는 공간이기에 스튜디오 아르는 “클라이언트가 다섯 명인 프로젝트”라고 이 집을 정의한다.


이광호와 협업해 온 타일 브랜드 ‘타지미(Tajimi)’에 별도 주문해 건물 외벽을 마감했다. 진한 회색조의 유광 타일은 빛에 따라 다채로운 색을 띤다. 외벽에 설치한 수전 역시 동 소재로 제주의 바람과 비를 겪으며 세월을 입을 것이다.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을 가로지르는 조명. 잉고 마우러의 ‘야야호(Yayaho)’다. 금속 와이어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조명은 직선과 곡선이 공존하는 섬세한 구조로 공간에 긴장감을 만든다. 단순히 ‘꾸밈’을 위한 조형물이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첫 번째 재료 같다. 조명 설치를 위해 구할 수 없는 부속을 직접 깎아가며 하나하나 제작했다. 커튼 레일 역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제품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스테인리스를 접어 직접 만들고 슬라브 안쪽으로 숨겼다. 이렇듯 기능과 감도를 결합시킨 디테일에 이 집이 추구하는 태도가 있다. 집의 내벽 전체는 합판과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질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인상적이다. 합판은 제주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결무늬가 진한 소재를 선택했다. 제주라는 장소성과 이곳의 기후, 작가의 조형 언어를 함께 고려한 결과물이다. 합판은 이 집의 피부처럼 모든 공간을 잇고 흐르게 만든다.


제주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결무늬 합판으로 짠 키친 시스템이 아름답다. 주방 상부의 한 벽을 가득 채운 유리 블록에는 일조의 흐름에 따라 다채로운 빛이 든다. 바람이 불면 창밖 나뭇잎의 그림자가 유리 블록에 비쳐 어른거린다. 세 아이의 방이 한 줄로 자리한 2층 공간.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에는 잉고 마우러의 또 다른 조명 ‘루지 온 더 월(Luzy on the Wall)’을 재치 있게 걸었다. 각 실내 환경에 알맞은 형태와 구성으로 설치할 수 있는 잉고 마우러의 모듈식 조명 ‘야야호’.

일관된 재료 언어 속에서 조명과 수전, 커튼 같은 오브제들은 더욱 분명한 밀도로 자리 잡았다. 노출 콘크리트 벽의 어떤 모서리는 거푸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살짝 으스러지거나 둥글어졌다. “일반적인 건축주였다면 시공 과정에서 생긴 흔적을 말끔히 없애야 했을 거예요. 이 집에선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광호 작가의 집이니까요.” 아르가 설명을 보탰다. 주방은 거실과 함께 집의 중심을 이룬다. “주방에는 요리할 때의 열기나 냄새를 위한 건축적이고 아날로그적인 해법도 적용됐어요. 층고를 높인 거죠.” 부엌과 거실 사이에는 알바 알토의 다이닝 테이블과 의자를 뒀다. 처음 계획한 것보다 더 작은 사이즈의 테이블이지만 이 집의 리듬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집에 알맞는 가구들의 스케일에 신경 썼어요. 소파는 위키노 제품인데, 일반 제품보다 슬림한 버전으로 주문했죠.” 집 안 곳곳에는 이 다섯 명의 삶이 디테일하게 새겨져 있다.


안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에도 적용된 수납공간. 황색 젤 타일로 마감한 욕실의 수전 역시 동 소재로 생산된 볼라 제품이다. 도어 핸들은 알바로 시자의 디자인. 황동 소재의 수전은 볼라(Vola).

아이들 방은 스튜디오 아르가 맹그로브와의 협업에서 얻은 1인실 스케일 아이디어를 참고해 설계됐다. 집 안의 모든 수납 시스템에는 문을 여닫는 반경을 줄이기 위해 슬라이딩 도어를 적용했다. 세 아이의 방이 있는 2층에서 세탁물을 떨어트리면 1층의 세탁실에 바로 담기는 재미있는 구멍도 있다. 단순한 편의 장치를 넘어 삶의 리듬을 건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도어 핸들은 모두 건축가 알바로 시자 디자인, 거실 커튼과 소파를 비롯해 패브릭은 모두 크바드랏, 수전은 황동 소재로 제작된 볼라의 컬렉션으로 선택하는 등 곳곳의 하드웨어에도 치밀한 큐레이팅이 더해졌다. 집 외벽에도 동 소재의 샤워 수전을 설치한 것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놀다 들어와 그대로 씻을 수 있는 수전이에요. 제주도에 살면 꼭 필요한 장치이고, 제주도이기에 동파 위험이 거의 없어 선택할 수 있었던 디테일이죠.” 제주의 바람과 비에 부식되며 점차 색이 변할 이 수전은 계절이 남긴 흔적처럼 앞으로 천천히 쌓아갈 시간과 비례해 이 집에 스며들 것이다.


크바드랏의 자수 패브릭으로 만든 커튼과 꽃무늬 매트리스 커버. 테니스를 하는 아이의 캐릭터를 반영한 의자까지 막내딸에 대한 애정으로 채운 방.

크바드랏의 자수 패브릭으로 만든 커튼과 꽃무늬 매트리스 커버. 테니스를 하는 아이의 캐릭터를 반영한 의자까지 막내딸에 대한 애정으로 채운 방.

이 집엔 이광호의 작업이 없다. 훗날 거실 한편에 딱 한 조각만 걸 계획이다. “제 작업보다 차라리 딸의 테니스 라켓을 걸고 싶어요. 내게 집이란 온전히 가족의 공간이죠. 꿈꾸던 모습의 거실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단출하고 편안한, 다섯 가족이 함께 잘 살아보려는 구조예요.” 이광호의 집 2층은 나무 가벽으로 구획을 나눠 지은 공간이라 언제든 허물고 재편할 수 있다. 아이들이 하나둘 독립하면 공간도 그만큼 다시 열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결국 이 집은 이 시절의 가족에게 최적화된 구조이자, 각자의 삶을 다듬어가는 방식을 고스란히 품을 준비가 된 자리다. 이 집은 이광호에게 조용히 지키고 싶은 가족의 시간을 새길 또 다른 ‘기지’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사진가 맹민화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