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최초의 여성 터너 수상자는 텅 빈 공간을 조각합니다

레이첼 화이트리드는 형태를 복제하는 기술로서 기억과 시간, 부재를 환기한다

프로필 by 권아름 2025.06.25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조각은 어떤 형태가 빠져나간 자리, 그 빈자리를 포착하는 데 가깝다. 사물과 공간의 표면을 따라 주조하고, 그 안쪽을 부드럽게 떠낸다. 형상을 재현하기보다 그 안에 침전된 시간의 흔적과 사라진 존재를 담아낸다. 콘크리트로 주조된 건축적 스케일의 대표작은 잊히고 스쳐간 삶의 궤적과 그 공간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다. 묵직한 침묵으로 말을 건네는 그녀의 작품은 결국 사라진 것들을 위한 기념비가 된다.


‘The Gran Boathouse’(2010).

‘The Gran Boathouse’(2010).

‘Nissen Hut’(2018).

‘Nissen Hut’(2018).

형태를 복제하는 기술로 여겨지는 주조법은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작업에서 기억과 시간, 부재를 환기하는 매체로 작동합니다. 이 기법에 주목하게 된 계기나 사유가 있었을까요

대학 시절,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이라는 작가의 워크숍에 참여한 적 있었는데 그때 그가 주조하는 법을 알려줬어요. 모래에 숟가락을 눌러 자국을 만든 뒤, 그 틀에 용융 금속을 부었죠. 하지만 완성된 결과물은 ‘숟가락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이었어요. 그 경험을 통해 저는 공간을 물질로 채운다는 개념에 매료됐고, 이후 제 작업은 자연스럽게 석고를 활용한 더 큰 규모의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Internal Objects’(2021) 전시 전경.

‘Internal Objects’(2021) 전시 전경.

초기 작품의 대부분은 일상에서 사용되던 사물을 주조한 것이었어요. 일상적 객체를 조각으로 남기며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나요

항상 인간의 손길이 스친 흔적에 관심을 가졌고, 구체적인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은 피했습니다. 처음 만든 작품 중 하나인 ‘Closet’은 어린 시절 옷장에 앉아 있던 기억에서 출발했어요. 그 기억은 어떤 부정적인 감정보다 오히려 편안했던 장소로 남아 있었죠. 그 공간을 물리적인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단순히 개인적인 기억이 아니라 가족의 삶 속에서 오래 사용된 물건들 또는 길거리에 버려졌거나 중고 가게에서 발견한 사물도 주제로 삼아 타인의 이야기도 담았죠. 결국 사물에 깃든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Ghost’(1990).

‘Ghost’(1990).

‘Ghost’는 당신의 첫 번째 대형 조각이자 이후 건축 규모의 작업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실제 공간을 주조하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웠을 것 같아요. 기술적 혹은 정서적으로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이전에는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혼자 작업했어요. 그때도 석고 조각을 만들고 옮기는 일 자체가 꽤 힘들었죠. 하지만 집을 만드는 작업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경험이었어요. 콘크리트로 완전히 덮인 건물 안에서 작업했는데, 공기가 습하고 매우 불쾌한 환경이었죠. 어두운 공간 속 전등 아래서 건물 외벽을 벗겨내고, 벽돌도 일일이 제거해야 했어요. 신체적으로도 큰 부담이었죠.



‘House’,(1993).

‘House’,(1993).

1993년에는 재개발로 철거 예정이었던 이스트 런던의 오래된 테라스 하우스를 실제 크기로 주조한 ‘House’로 여성 최초로 터너상을 수상했죠. 실제로 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이 작품은 결국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철거됐는데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유는

이 작업은 재개발로 사라진 삶의 흔적과 공동체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제 작업 중 일부는 정치적인 동시에 감정적인 면을 갖고 있어요. ‘House’ 역시 그런 면에서 사람들과 강하게 연결됐고, 많은 이들이 그 의미를 깊이 공감했습니다. 공공의 공간이 개인의 기억과 경험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실제로 작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그 존재를 기억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신화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작품이 된 셈이죠.



‘US Embassy(Flat pack house)’(2013~2015).

‘US Embassy(Flat pack house)’(2013~2015).

'US Embassy(Flat Pack House)' 작업에서는 1950년대 미국 교외 가정집을 해체하고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기존에 전체 공간을 주조하는 방식과 달리 해체하고 재조립한 데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장소가 인간의 거주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어요. 사람들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며 생겨나는 다양한 주거 형태와 그 안에 담긴 사회적 변화에 관심이 많았죠. 이 작품에서는 1950년대 미국 교외에서 유행했던 DIY 키트로 조립할 수 있는 플랫 팩 하우스를 하나의 은유로 사용했어요. 당시 사람들은 카탈로그에서 디자인을 선택해 조립식 주택을 세웠고, 이런 집들이 반복적으로 지어지면서 거리와 커뮤니티가 형성됐습니다. 이처럼 표준화된 구조가 어떻게 특정 시대와 장소의 사회적·시각적 문화를 반영하는지 탐구하고 싶었어요. 동시에 ‘집’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정체성과 소속감, 상실의 가능성에 대한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플랫 팩 하우스 구조와 패턴을 추출해 콘크리트 프리즈로 재구성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집'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 같습니다. 레이첼 화이트리드에게 집은 어떤 정서적·상징적 의미를 지닌 공간인지

집은 가족과 친구, 음식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개인적 공간으로서 고요함과 평화를 주는 장소예요. 모든 것의 중심이며 본질적으로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고립시킬 수 있는 곳이죠. 집은 구조이자 감정의 공간입니다.


지금은 어떤 건물을 주조하고 있나요

여전히 일반적인 건물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데, 최근 'Shy Sculptures'라는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제 평생의 프로젝트로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사진 © BEN THOMAS-FORESTRY COMMISSION
  • 사진 MIKE BRUCE · PRUDENCE CUMING ASSOCIATES
  • 사진 RACHEL WHITEREAD · SUE OMEROD
  •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GOS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