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틀지 마세요, 당기세요

디자인 아틀리에 ‘에이치콤마’ & ‘르시뜨피존’의 대표 김한규의 최애 사물, 무인양품 CD 플레이어.

프로필 by 윤정훈 2025.09.26

무인양품 CD 플레이어

매일 사물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컵에 물을 담아 마시고,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열고, 소파에 앉아 하루의 피로를 푼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동작은 너무도 익숙해서 우리는 이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 뒤에는 사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제안’하는 디자인적 요소가 숨어 있다. 바로 ‘어포던스(Affordance)’다.


어포던스는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이 제시한 개념으로, 한 사물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직관적 사용 가능성’이나 ‘행동 유도성’을 뜻한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도널드 노먼(Donald A. Norman)이 이를 발전시켜 “좋은 디자인은 사용법을 말하지 않고도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버튼은 누르도록 생겼고, 손잡이는 잡도록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사용자는 디자인을 통해 사물의 사용 방식을 ‘느끼고’, 사물은 사용자에게 조용히 작동 방식을 ‘제안’한다. 물리적인 버튼이 지금보다 제곱으로 많았던 시기에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내게 이는 언제나 중요한 화두이자 관념이었다. 그리고 후카사와 나오토가 디자인한 ‘무인양품 CD 플레이어’는 이를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게 구현한 사례다.


환풍기처럼 생긴 이 기계는 사각형 본체와 그 아래 자연스럽게 늘어진 하나의 줄이 전부다. 설명서가 없더라도 처음 보는 순간 줄을 당기면 작동하리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 ‘줄’이 핵심적인 어포던스다. 줄을 당긴다는 행위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익숙한 동작이다. 오래된 선풍기, 욕실의 조명 스위치 혹은 창문의 블라인드처럼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줄을 당기는 행위가 ‘작동’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걸 알고 있다. 후카사와는 이 집단 기억에 디자인을 끌어들였다. 그는 줄을 당기는 동작을 통해 음악이 재생되는 방식을 사용자의 몸에 밴 기억과 연결되도록 유도했다. 무의식중에 줄을 당기고, 그 순간 CD가 회전하며 음악이 시작된다. 물리적 작동감과 소리의 연결. 제품의 어포던스가 강하게 작동하는 지점이다.


후카사와의 무인양품 CD 플레이어는 디자인 자체가 ‘개입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며 사용자의 삶에 조용히 스며들고, 물리적 작동 과정에서 사용자는 음악을 ‘틀었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차분히 고른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넣고, 줄을 당겨 음악이 흐르게 하는 일련의 감각적 과정은 스트리밍 서비스처럼 손가락 몇 번의 터치로 순식간에 음악이 흘러나오는 경험과는 분명히 다르다. 마치 찻잔을 고르고, 물을 끓이고, 찻잎을 우리는 다도처럼 물리성과 직관성의 결합은 디지털의 편리함이 지나치게 강조된 시대에 아날로그의 번거로움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오며, 단순 기능을 넘어 정서적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사용자가 사물을 인식하지 않아도 되는 디자인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그의 말처럼 사용자의 몸이 자연스럽게 사물과 연결되는 디자인적 사고방식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복잡한 조작법이 난무하는 현대에 오히려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디자인이란 결국 사용자와 사물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이다. 그 관계가 자연스럽고, 무리 없고, 감각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는 ‘좋은 디자인’이라 말할 수 있다. 이 CD 플레이어는 그 모든 조건을 조용히 충족하며 벽 한 쪽에 그리고 우리 앞에서 줄 하나로 손과 마음을 끌어당기며 조용히 보여주고, 기다리고, 그 다음엔 함께 흐른다. 사물이 조용히 말하는 방식 그리고 사용자가 그 말을 알아듣는 능력. 언어가 아닌 몸의 경험으로 주고받는 이 무언의 소통이 오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사물에 반응하고 집착하며, 애정과 애착의 동기화가 이뤄진다. 무인양품 CD 플레이어의 줄 하나로 단순히 음악을 트는 기계가 아닌, 시간이 지나도 곁에 두고 싶은 하나의 ‘클래식’이자 ‘동아줄’이 됐다. 나는 무언가를 집에 들일 때 그게 얼마나 유명한지보다 내 일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얼마나 내 삶을 조금 더 매만져줄지 생각한다. 이렇게 사각형 하나, 줄 하나에 매달린 이 물건은 줄곧 내가 머무는 모든 공간마다 자리하며 나와 일상을 함께 나누고 있다. 함께하자.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줄 하나 당길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김한규

디자인 아틀리에 ‘에이치콤마’와 온라인 상점 ‘르시뜨피존’을 운영하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글 김한규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