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재스퍼 모리슨이 말하는 슈퍼 노멀의 힘

“정말 좋은 오브제는 결코 요란하지 않아요. 조용하지만 쓰임을 통해 진가를 드러내죠.”

프로필 by 권아름 2025.09.16
절제된 디자인 미학의 대가 재스퍼 모리슨과 그가 디자인한 비트라의 ‘APC’ 의자.

절제된 디자인 미학의 대가 재스퍼 모리슨과 그가 디자인한 비트라의 ‘APC’ 의자.

알레시의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Drinking Glass Family)’를 사용할 때마다 기능성과 우아함이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 테이블웨어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마치 ‘디자인이 사라진 디자인’ 같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조용하고 강렬한 존재감을 가졌죠

제가 무언가를 ‘발명’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오히려 오래전부터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이름 없는 오브제들이 지닌 조용한 힘에 주목해 왔습니다.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도 그런 관찰에서 비롯된 디자인이에요. 존재를 과시하지 않으면서 사용자와 공간 속에서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내는 물건. ‘슈퍼 노멀(Super Normal)’ 역시 이런 사물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2008년 런던 쇼디치에 문을 연 재스퍼 모리슨의 숍.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물건을 판매한다.

2008년 런던 쇼디치에 문을 연 재스퍼 모리슨의 숍.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물건을 판매한다.

2006년 도쿄 아시스(Axis) 갤러리에서 열린 <슈퍼 노멀> 전시에서는 비알레티의 ‘모카 익스프레스’부터 익명의 오브제까지 다양한 사물이 소개됐습니다. 이 전시가 당신의 태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선언처럼 느껴졌어요

디자인은 종종 본질을 잊고 지나치게 예술적이거나 시각적으로 과장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탄생한 물건은 실제 삶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슈퍼 노멀’은 이런 디자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진정으로 유효한 물건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시도였어요. 좋은 오브제는 요란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쓰임을 통해 진가를 드러내죠.


파리의 고물상에서 찾은 오래된 와인 잔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알레시의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의 초기 스케치와 와인 잔.

파리의 고물상에서 찾은 오래된 와인 잔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알레시의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의 초기 스케치와 와인 잔.

파리의 고물상에서 찾은 오래된 와인 잔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알레시의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의 초기 스케치와 와인 잔.

파리의 고물상에서 찾은 오래된 와인 잔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알레시의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의 초기 스케치와 와인 잔.

재스퍼 모리슨의 디자인은 종종 오래된 사물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드링킹 글라스 패밀리’는 파리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유리잔에서, ‘싱킹 맨스 체어(Thinking Man’s Chair)’는 시트만 사라진(?) 고가구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압니다. 시간의 흔적을 품은 사물은 당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거나요

주의를 기울이면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반면 마음을 닫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저는 오래된 물건에서 본질적 요소를 찾아내 새롭게 되살리는 과정을 좋아해요. 낡았지만 여전히 동시대 감각을 지닌 물건을 보면 늘 감탄하죠. 그런 사물은 조용히 저에게 말을 걸어요.


2008년 무지에서 처음 선보였고, 2023년부터 헤이에서 생산 중인 벽시계.

2008년 무지에서 처음 선보였고, 2023년부터 헤이에서 생산 중인 벽시계.

일상 속 상상력을 자극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셔터를 누르게 만든 장면은

사진을 찍는 건 주변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좋은 훈련이에요. 최근 세라믹 공장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줄지어 놓인 노란 강철 튜브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어요. 장식 하나 없이 그 형태만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힘이 느껴졌죠.


ATM 사무 가구의 전선 정리용 알루미늄 트레이에서 출발해 비트라 CEO 아내의 제안으로 독립 제품으로 리디자인된 ‘로터리 트레이(Rotary Tray)’.

ATM 사무 가구의 전선 정리용 알루미늄 트레이에서 출발해 비트라 CEO 아내의 제안으로 독립 제품으로 리디자인된 ‘로터리 트레이(Rotary Tray)’.

디자이너가 되기 전 처음으로 사물을 ‘디자인’으로 인식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지금의 관찰자적 태도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1970년대의 런던은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활발했어요. 우리 집엔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의 빨간 ‘카리마테(Carimate)’ 의자와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턴테이블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그 물건에 이끌렸고 미술 시간에 따라 그리기도 했죠. 본격적으로 마음을 굳힌 건 미술학교에 막 들어간 무렵, 런던 V&A 뮤지엄에서 아일린 그레이의 전시를 봤을 때였어요. 그때 처음으로 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했고,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면 멤피스 전시는 내가 지향하지 않는 방향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게 해준 계기가 됐습니다.


자전거 프레임의 뼈대를 이루는 고급 금속관을 제작한 전설적 장인 질베르토 콜롬보(Gilberto Colombo)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설계한 ‘질코 100 로드 바이크(Gilco 100 Road Bike)’.

자전거 프레임의 뼈대를 이루는 고급 금속관을 제작한 전설적 장인 질베르토 콜롬보(Gilberto Colombo)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설계한 ‘질코 100 로드 바이크(Gilco 100 Road Bike)’.

작은 홈 액세서리부터 가구, 자전거, 와인, 신발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해 왔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거나 도전이었던 프로젝트가 있다면

거의 모든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아요. 디자인을 하다 보면 각기 다른 맥락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반복된다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사물을 디자인하는 일의 가장 좋은 점이죠.


비트라를 위해 디자인한 세 개의 모듈형 세라믹 육각형 용기 ‘헥사코날 콘테이너스(Hexagonal Containers)’.

비트라를 위해 디자인한 세 개의 모듈형 세라믹 육각형 용기 ‘헥사코날 콘테이너스(Hexagonal Containers)’.

반대로 와인 상자에서 영감을 얻은 ‘크레이트(Crate)’ 사이드 테이블은 다소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업으로 기억합니다. 스스로 ‘문제작’이라 생각하는 작업이 있나요

물론 잊고 싶은 작업도 몇 가지 있어요. 상업적으로 실패하진 않았지만 기대만큼 잘 나오지 않은 프로젝트죠. 하지만 ‘크레이트’는 그렇지 않아요. 이 제품에 확신이 있었고, 지금도 그래요. 논란이 생긴 건 아마도 와인 상자를 가구로 재현한 시도를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봤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실제로 5년 넘게 와인 상자를 가구처럼 사용하며 그 오브제의 가치를 확신했어요.


접시나 그릇을 벽에 걸던 오래된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접시나 그릇을 벽에 걸던 오래된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다고 여긴 사물을 디자인으로 구현해 나갈 때 가장 우선시하는 요소는

디자인의 모든 단계가 중요합니다. 아이디어를 얻기 전부터 '좋은 물건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의식하는 태도 자체가 이미 과정의 일부예요. 그렇게 축적된 생각들이 결국 영감의 바탕이 됩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가장 본질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찾으려 해요. 제작 단계에서도 그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능한 한 디자인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지만, 제가 말하는 ‘최소화’는 예술에서 말하는 미니멀리즘과는 달라요. 값비싼 재료나 장식 없이도 오브제는 충분히 풍부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능이 아닌 이상 어떤 요소를 더한다고 반드시 더 좋아지는 건 아니에요. 때로는 ‘더함’이 방해가 되기도 하죠.


제스퍼 모리슨 숍에서는 그가 디자인한 제품뿐 아니라 저그나 병처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실용적인 일상 용품을 함께 선보인다.

제스퍼 모리슨 숍에서는 그가 디자인한 제품뿐 아니라 저그나 병처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실용적인 일상 용품을 함께 선보인다.

“디자인에서 형태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해왔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태도’란 무엇인가요

내가 말하는 ‘태도’는 그 사물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외형도 그 일부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물건이 공간과 사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일상에서 어떤 관계를 맺는지 중요하다는 것이죠. 아무리 멋져도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공간의 흐름을 해친다면 좋은 디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제품들은 기능성과 디자인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엄선된 것들이다.

이 제품들은 기능성과 디자인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엄선된 것들이다.

최근에 발견한 제품 중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 있다면

오늘 누군가가 포르투갈산 저가 와인 잔을 선물해 줬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포르투갈 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꺼운 유리로 만든 잔인데 쌓을 수 있도록 디자인돼 있어 실용적이면서도 매력적이에요. 정말 멋진 물건이죠.


 핸들은 다소 납작하고 아래는 곡선형 단면을 가진 무지의 커트러리 세트.

핸들은 다소 납작하고 아래는 곡선형 단면을 가진 무지의 커트러리 세트.

알루미늄 소재로 이음매 없이 제작된 라미의 ‘아이온(Aion)’.

알루미늄 소재로 이음매 없이 제작된 라미의 ‘아이온(Aion)’.

런던 스튜디오 옆에서 오래된 철물점 컨셉트의 작은 숍도 운영 중이죠. 직접 디자인한 제품뿐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사물도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이 공간은 어떻게 시작했고 당신의 디자인 실천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2001년 일본에서 소리 야나기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마당 건너편에 그가 만든 제품을 직접 판매하는 작은 가게가 있었어요. 일부러 찾아온 사람만 발견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었고, 자신의 물건에 대한 애정과 확신을 직접 전한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어요. 그 경험이 계기가 되어 런던 스튜디오에 여유 공간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숍을 열게 됐습니다. 제가 디자인한 제품뿐 아니라 일상 속 실용적인 물건을 함께 소개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피처’ ‘유리컵’ ‘테이프 롤’처럼 하나의 쓰임을 가진 물건을 모아 한 제품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식이죠. 우리가 하는 일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숍은 우리가 디자인하는 물건이 정말 쓸모 있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사진 ©ALESSANDRO MILANI·ASUKA KATAGRI·NICOLA TREE·THOMAS MARTIN
  • COURTESY OF JASPER MORRISON STUDIO · VITRA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