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운동에 이런 집이?
김효영 건축가가 지은 하나의 작품 같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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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서 바라본 집. 입구와 또 다른 얼굴이다.
“덜한 건 지루하다(Less is Bore).” 서울 청운동 언덕 깊숙한 곳, 선연한 붉은빛의 이 집을 보면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의 말이 여지없이 떠오른다. 빛바랜 벽돌에 그보다 선명한 빨강으로 칠한 금속 문을 더하고, 투명한 유리 블록을 두른 발코니는 툭 불거진 이마처럼 튀어나와 있다. 이렇게 이질적인 조합이라니. 정석대로 잘 쌓은 화음은 아닐지라도 각기 다른 요소들이 미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의도된 과장의 미학이다. “건축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기보다 각 부분이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걸 더 좋아해요. 지붕과 벽, 기둥, 창호가 각자 존재감을 갖는 동시에,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대비가 제겐 중요한 표현 방식이거든요.” 38년 된 집을 이렇게 바꾼 김효영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디자인 언어를 구사하는 건축가다. 대담한 표현력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디자인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그의 작업을 단지 스타일의 차원으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어딘가 다른 건축을 지향하는 건 ‘낯섦에서 오는 힘’을 믿어서이고, 의도적으로 부풀린 외양 이면에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기준이 있다. 집은 1987년 청운동의 높다란 땅 위에 들어섰다. 비슷한 규모와 외관의 주택 일곱 채가 함께 들어서 하나의 단지를 이뤘고, 한적한 분위기의 그 모습은 여전히 유지되는 중이다. 흥미롭게도 리모델링의 시작은 30여 년 전 이곳을 떠난 집주인이 다시 돌아와 살게 되면서다. 젊은 시절 부모님과 이곳에 살다 미국으로 이주한 건축주 박지훈은 50대 후반이 돼 서울로 돌아왔다. 머물 곳을 찾다가 오래전 임대 준 이 집을 떠올렸다.

울창한 소나무가 보이는 침실. 천장과 벽,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는 지점까지 붉은 라인으로 처리한 디테일.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


“보기 드문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에요. 걸어 다니며 갈 만한 곳도 많고, 자연도 풍부하죠. 사실 이우환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 이 집을 구입했는데, 사정이 생겨 선생님과 인연이 있던 저희 어머님이 대신 인수한 거죠.” 이우환 화백이 점찍었고, 달항아리 작가인 어머니가 머물렀던 집. 그도 그럴 것이 발코니에 들어서자마자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압권이다. 한옥이 즐비했던 과거에 비해 현대적 건물이 들쑥날쑥 들어섰지만 북악산의 능선과 탁 트인 하늘, 뒷마당에 심겨진 튼튼한 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 이 탁월한 입지를 새롭게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오래전이지만 추억을 간직한 곳이고, 이웃집과의 조화도 깨고 싶지 않았다. 김효영 건축가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나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야기를 잇는 건축주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과거의 기억이 담긴 집이고,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집이기에 어떻게 하면 두 시간 사이의 접점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설계의 전체적인 방향은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함께한 정희철 건축가와 논의하며 잡아나갔다. 모든 것에 우선해 대대적인 구조 개선이 필요했다. 오래된 구조를 보강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집의 레이아웃을 바꿔야 했던 터라 전체적인 뼈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적조를 철골 구조로 변경했다. 곳곳에서 눈에 띄는 빨간 기둥은 그런 집의 변화를 말해 주는 표식과 같다. 외관의 낡은 벽돌은 거의 그대로 두고 금속과 유리 벽돌, 나무, 돌 같은 재료를 군데군데 더했다. “건축주의 취향을 고려해 예스러운 분위기를 내면서 새로운 무드를 더하고 싶었어요. 그 일환으로 선택한 재료가 붉은색 금속과 유리 벽돌입니다. 기존 벽돌과 각각의 색깔, 형태 면에서 유사하지만 명확한 차이가 있죠. 유사성을 가져가면서 다른 감각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원형 계단은 본래 이 집에 있던 구조로, 목재 계단과 붉은색 핸드레일이 더해져 한층 매력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1층 거실. 유리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은 공간을 투명하게 구분하면서 소장한 그림들을 걸어두는 곳으로 역할한다. 창가엔 건축주의 어머니가 만든 달항아리가, 그 너머 바깥엔 달항아리 파편으로 만든 원형 벽 오브제가 설치돼 있다.

거실 한쪽에 마련된 주방. 곳곳에 설치한 붉은색 도장의 기둥은 인테리어 포인트이자, 조적조에서 철골 구조로의 변화를 암시한다.
설계 과정에서 1930년대 피에르 샤로가 설계한 ‘메종 드 베르(Maison de Verre)’를 참조하기도 했는데, 그건 디자인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을 만든 공예적 태도를 차용하는 일에 가까웠다. 일상에서 ‘시간’을 인식하도록 하는 게 당초 목표라면, 단순히 예전 재료를 남기기만 하는 것보다 아예 ‘다른 시대에 있는 느낌’을 주는 것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치 오래전에 잘 지어진 집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낯섦에 휩싸이듯 말이다. 정교한 콜라주를 하듯 여러 재료를 세심하게 덧대고 쌓아 올린 과정은 건축이라기보다 공예에 가까웠다. 집에 있는 거의 모든 가구는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 ‘디비디비 스튜디오’와 함께 만들어 채워 넣었고, 계단의 핸드레일이나 발코니 난간 등의 사소한 부분까지 기성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제작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접근은 일평생 달항아리를 빚어온 건축주의 어머니와도 연결돼 멋진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이 집에서 가장 과감한 제스처죠.” 건물 측면에 달린 커다란 원형 벽에 대한 김효영 건축가의 한 마디다. 대담한 것투성이인 이 집에서 가장 과감하다고 할 만한 요소는 집 뒤편에 따로 있다. 맞은편에 빌라가 새로 생겨 프라이버시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에 김효영은 높은 담장 대신 커다란 원형 벽,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오브제를 만들어냈다.

현관에서 살짝 보이는 원형 벽 오브제. 지름만 6m에 달한다.

현관. 바깥으로 튀어나온 계단실 외부를 붉은색으로 도색한 금속으로 덧입혀 흥미로운 입구를 만들어냈다.
지름이 무려 6m에 달하는 이 원형 벽은 달항아리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표면에 건축주 어머니의 도예 작업장에서 가져온 달항아리 파편을 하나하나 붙여 특별하게 완성했다. “과거 여기에 살던 사람이 다시 돌아왔고, 그로 인해 집도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어요. 단순히 시선을 가리기 위한 구조물이 아니라, 상징성과 조형미를 지닌 존재가 되길 바랐고요. 원래는 더 컸어요. 심의 과정에서 줄어든 게 저 정도예요(웃음).” “정말 만족하고 있어요. 저만의 집을 짓는 게 오랜 꿈이었거든요.” 그래도 살림집인데 너무 전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묻자 박지훈 건축주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건축의 제1조건은 땅도, 예산도, 디자인도 아닌 함께하는 건축가를 믿는 클라이언트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는 게 이 집이다. 건축주가 미술 관련 일을 하면서 평소 건축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높아 가능한 결정이었으며, 김효영에 따르면 자칫 부담스러울 만한 디자인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지내는 동안 가장 멋진 순간은 언제였을까. “밤이 되면 1층 불은 모두 꺼지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설치된 작은 조명이 유리 블록에 반사돼 은은하게 빛나요. 그 모습이 꽤 볼만합니다. 곳곳에 좋아하는 나무와 돌이 사용돼 산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도 들어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유리 블록 같은 독특한 재료를 어떤 분은 ‘가정집 같지 않다’고 싫어하지만(웃음). 아마 이런 집은 서울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에게 영영 낯설게 다가갈 청운동 주택. 하지만 그 ‘낯섦’에서 오는 재미와 이야깃거리야말로 이 집이 품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사진 최용준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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