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간을 날아 도착한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브린디시 공항의 분위기는 분주하지 않았다. 공항을 듬성듬성 채운 사람들은 여유로웠고, 공항 색채도 단조로웠다. 한껏 차려입고 느릿느릿 걷는 이 사람들은 어쩌다 풀리아에 왔을까? 여행자들을 한참 구경하던 나는 서울에서 볼 수 없는 새파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낯선 도시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풀리아 주는 수정처럼 맑은 물과 백사장이 펼쳐진 그림 같은 바닷가, 가파른 암석 위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건물, 싱싱한 자연과 고전예술의 모습을 고루 갖춘 도시다. 예술적인 바로크 양식 건축물의 압도감을 생생히 전하는 곳. 특히 풀리아의 레체(Lecce) 현은 위대한 예술과 건축으로 ‘남쪽의 피렌체’라는 별명을 지녔다.
이탈리아 카스트로 마리나에 위치한 양떼 목장을 유유히 통과하는 폴고레.
레체의 구도심을 걸으며 원형극장에 앉아도 보고, 레체 출신의 유명 건축가 주세페 짐발로의 대표작이자 두오모 광장을 아름답게 장식한 성모승천 대성당의 압도감을 느끼다가, 레체의 구도심 입구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 중 하나인 산 비아조 문을 통과하며 이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내뿜는 힘과 냄새, 소리, 미적 형상을 흠뻑 만끽했다. 모든 건축물은 석회암의 일종인 ‘레체 스톤’으로 지어졌다. 소재가 물러서 화려한 조각을 표현하기 쉽기 때문에 사용됐다고. 섬세하게 깎은 건물 장식에서 받은 예술적 영감은 이번 여행에서 머문 라 피에르몬티나(La Fiermontina) 리조트로 이어졌다. 리조트 곳곳을 채운 프랑스 조각가 르네 르투르뇌르(Rene´ Letourneur)와 자쿠에스 조바다(Jacques Zwobada)의 조각과 그림은 웅장함과 고풍스러움을 자아냈다. 맑은 새소리를 들으며 리조트 한쪽을 수놓은 정원을 걷다 두 여자가 나란히 서 있는 조각상과 만났다. 한참 동안 응시한 두 여자 조각상 뒤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 마세라티 그레칼레 폴고레(Maserati Grecale Folgore)다. 마세라티 그레칼레 폴고레는 이 도시와 리조트 풍경이 전하는 고전적이고 중후한 모습과 많이 달랐다.
구리 소재로 양각된 마세라티의 삼지창 상징 아래에 있는 충전구. 폴고레의 충전구는 급속과 완속 충전이 가능한 형태로 디자인됐다. 전용 앱을 이용해 배터리 충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섬유 에코닐로 제작한 차량 시트. 통기성이 좋으며, 마세라티만의 파라메트릭 디자인이 적용됐다.
레체에 솟은 날 선 파사드 건물과 달리 폴고레는 마세라티의 삼지창 엠블럼을 내세운 날카로운 그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졌다. 곡선의 형태는 달팽이 등껍질처럼 나선형이 아래로 이어지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외형에서 영감받은 디자인이다. 차의 색은 오묘했다. 각도에 따라 초록과 파란빛이 오로라처럼 일렁거렸다. 이 오묘한 색의 이름은 다크 오로라 보레알레. 옆면에 작게 빛나는 사이드 에어번트는 1947년부터 선보인 마세라티 디자인의 상징적 요소다. 사이드 에어번트 상단에 구리 소재로 양각된 폴고레 이름과 삼지창 모양의 엠블럼은 모두 마세라티 디자인 센터인 센트로 스틸레에서 구상한 것. 양각 엠블럼 제작에 사용된 구리는 폴고레 모델에 적용된 특별 소재다.
회색빛과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블루 그래파이트 색상.
2023년 4월, 상하이 모터쇼에서 최초로 공개된 그레칼레 폴고레는 본격적으로 전동화에 뛰어들겠다는 마세라티의 야심을 드러내 주목받았다. 이탈리아어로 폴고레는 ‘번개’라는 뜻으로, 마세라티의 전동화 라인업 명칭이다. 레이싱 헤리티지와 고성능 라인업이 단단하게 자리 잡힌 마세라티 특유의 퍼포먼스와 성능, 우렁찬 사운드를 전기차에서도 그대로 지키겠다는 포부가 담긴 이름이다. 2025년까지 전체 라인업에 전동화 모델을 추가하고 2030년부터 내연기관 없이 순수 전기차만 생산하겠다고 선언한 마세라티는 폴고레 라인에 전용 내장재, 전용 휠, 색상을 적용해 일반 내연기관 차량과 차별화를 꾀했다. MC20에 이어 그란투리스모 그리고 그레칼레까지. 전기차 기반을 탄탄히 쌓아가고 있는 마세라티의 시간은 대담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레칼레 폴고레 제품 개발 매니저 캐롤라이나 볼로냐.
라 피에르몬티나 리조트 입구에서 출발해 마을을 지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폴고레는 내가 발로 액셀러레이터를 누르는 만큼 속력을 올렸다. 높은 속력을 위해 채찍질하고 싶을 때는 발을 더욱 지그시 눌렀다. 이런 내 행동에 정확하게 반응하는 폴고레와 나는 이미 한 몸이 돼 있었다. 100% 전기차인 만큼 추진력이 남달랐다. 500마력 이상과 최대속도 200km/h 이상의 속력을 자랑한다. 멈춘 상태에서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단 4.1초면 충분하다. 마세라티는 국제자동차연맹이 주관하는 세계적 전기차 레이싱 경기 포뮬러 E에 출전해 레이싱을 통해 얻은 전기차 노하우를 차량에 도입했다고 한다. 주행하기 전 확인한 차량 배터리는 80%가량 충전돼 있었다. 이 차는 105kWh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해 100% 충전하면 480~500km까지 주행할 수 있다. 국내에서 인증을 거치면 350km가량의 주행거리를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배터리가 부족하면 차량은 배터리 저장 모드에 돌입한다. 장거리를 운전할 때는 스스로 속력을 130km로 제한한다. 충전 속도도 적당하다. 급속 충전 기능을 갖췄고, 20%에서 80%까지 충전하는 데 29분 정도 소요된다.
약 30분을 달려 오래된 건물이 멋스러운 스테르나티아 마을에 접어들자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오트란토 해협이다. 휴식을 위해 잠시 내린 오트란토에서 목도한 폴고레는 더욱 미래적인 모습이었다. 외형의 매트한 질감과 푸른 색감이 더욱 돋보였다. 차의 자태를 조금 더 감상한 후 다시 운전대를 잡고 마세라티 허브로 향하자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시작됐다. 도로 상태에 따라 5단계로 차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에어 스프링 서스펜션 기능 덕분에 차가 통통 튀지 않았고, 좌석은 운전자의 몸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다기능 스티어링 휠 왼쪽에 시동 버튼이 있다. 휠에는 드라이브 모드 셀렉터와 ADAS 제어 버튼 같은 주요 기능이 배치됐으며, 알루미늄 패들 시프트는 그레칼레의 스포티한 특성을 강조한다.
마세라티 허브라고 칭한 곳은 바다를 옆에 둔 산중턱에 자리 잡은 담배 제조 폐공장을 개조한 정체 모를 건물이었다. 이곳은 숲속에 숨어 있었다. 건강한 양들이 뛰어다닐 것 같은 대자연에서 성대한 식사를 한 후, 폴고레의 내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치 물고기 비늘을 닮은 파라메트릭 디자인이 적용된 좌석 시트의 질감은 독특했다. 통풍이 잘될 것처럼 얇은 나일론 질감이었다. 이는 에코닐이라는 소재로 어망이나 천 조각, 카펫 등의 폐기물로 만들어진 재생 나일론이다. 마세라티는 2011년부터 에코닐을 사용하며 현재까지 꾸준히 지속 가능성을 실천해 왔다. 좌석 시트뿐 아니라 마감에 사용된 실도 동일한 섬유다. 차량 내부를 꼼꼼히 뜯어보자 마세라티 허브에서 느꼈던 대자연의 경이로움이 꽤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달려온 길과 리조트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약 250km. 장거리를 주행할 때 졸음에 대한 압박을 피할 수 있도록 차량의 졸음 방지 기능은 예민하고 똑똑하게 작동돼야 한다. 폴고레가 운전자의 졸음을 파악하는 방법은 눈 깜빡임 횟수다. 횟수를 세어 한계에 다다르면 대시보드에 커피잔 모양이 떠오른다. 시크하지만 귀여운 포인트다.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풀리아 레체의 골목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영감받은 현대적 디자인의 그레칼레 폴고레의 대조적 풍경. 폴고레만의 매트한 질감과 ‘라메 폴고레’라 불리는 특유의 갈색에 가까운 색감이 돋보인다.
굳건히 고수해 온 내연기관차라는 자동차의 패러다임이 전기차로 이동을 시작한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전기차는 이제 자동차시장에서 현실이 됐다. 현실에 뛰어든 마세라티는 미래를 어떻게 펼쳐나갈까? 해답은 디자인과 성능, 친환경을 잡은 그레칼레 폴고레에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브린디시 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