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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그래도 미래를 향해 걸어야 한다면

프로필 by 황효진 2024.01.30
 안사와 홀라파. 둘의 애정전선은 녹록치 않다

안사와 홀라파. 둘의 애정전선은 녹록치 않다

그래도 미래를 향해 걸어야 한다면

새해의 첫 영화를 고를 때는 평소보다 몇 배로 신중해진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어떤 음악을 듣느냐가 그해를 좌우한다는 농담이 있는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큰 기대 없이 개봉한 영화 리스트를 쭉 살펴보다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눈에 띄었다. 평소 로맨스물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헬싱키+빈티지+로맨스’라는 키워드가 조합된 포스터 문구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귀여운 강아지가 출연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강아지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나쁠 리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고양이도 마찬가지). 영화에 대한 상세 정보를 더 이상 찾아보지 않고 극장으로 향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안사(알마 포위스티)는 마트에서 일한다. 일은 생계 수단일 뿐 그에게 즐거움이나 보람을 주지는 않는다. 그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종종 집으로 챙겨 가는데, 이미 먹을 수 없는 상태일 때도 있다. 또 다른 주인공 홀라파(유 시 바타넨)는 공사장에서 일한다. 가끔 동료들과 술집에서 여가시간을 보내지만 대체로 무료하다. 홀라파에게 일상을 버티게 하는 연료는 담배와 술. 심지어 일과 일터(아마도 모두에게 그렇듯)는 안사와 홀라파를 사랑하지 않는다. 안사는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몰래 가져갔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동네 술집에 어렵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만, 사장이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돈도 못 받고 또 일자리를 잃는다. 일터에서 몰래 술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홀라파 역시 해고된다. 좋은 일이라고는 생기지 않는 삶에서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에게 끌린다.
 
나는 극장이란 현실을 잠깐 잊게 해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는 동안에는 현실을 잊을 수 없었다. 일의 종류는 다르지만 안사와 홀라파가 처한 상황은 나와 친구, 동료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안사의 라디오를 통해 끊임없이 들려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은 극장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 이렇게 따뜻하고 안온한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감상하고 있지만, 지구 어딘가에서는 매일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를 보며 잠시 현실을 잊는다고 해도 우리는 스크린 바깥의 현실과 절대 멀어질 수 없는,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의 몇몇 장면에 뭉클해지다가도 문득 ‘이렇게 편히 영화를 보고 있어도 될까?’ 하는 죄책감이 따라왔다. 영화를 보면서 이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낙관을 품기가 어려웠다.  
 
지난해는 전 세계적으로 좋은 일이 드물었다(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난해‘도’). 전쟁이 벌어지고, 자격 없는 사람이 중요한 직책에 앉고, 기후 위기의 신호는 더욱 또렷해지고, 물가는 오르고, 각종 예산은 삭감되고, 많은 사람이 일자리와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앞으로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신호 또한 드물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앞으로 모든 면에서 세상이 더 나빠질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루가 다르게 갱신되는 나쁜 뉴스들을 접하면서 죄책감과 불안함을 느끼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고, 그 일들은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졌다. 삶이 고단해서 전쟁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를 꺼버린 안사처럼, 세상과 타인은 물론 나조차 사랑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안사와 강아지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안사와 강아지

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을 거라면, 우리는 왜 계속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무엇을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안사와 홀라파는 겨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함께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다. 안사의 연락처를 적은 종이는 바람에 날아가버리고 홀라파에게는 사고가 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흘러가는 게 없지만 안사는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 성실히 일하고, 길에 버려진 강아지를 입양해서 가족으로 맞이하고, 의식 없는 홀라파의 곁에서 매일 글을 소리 내 읽는다. 안사를 보면서 낙관이란 거창한 의지나 실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내일 다시 새로운 날이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그냥’ 믿는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나를, 타인을,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일 테고 말이다.
 
안사가 회사에서 부당한 해고 통보를 받을 때, 그 옆에는 회사에 함께 맞서주는 동료들이 있다. 홀라파와 같은 건물에 사는 남자는 데이트를 하러 가는 홀라파에게 선뜻 옷을 내어주고, 홀라파가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역시 전남편의 멀쩡한 옷을 홀라파에게 선물한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지만 그때마다 눈물이 났다. 사람들의 사소한 호의와 작은 연대가 우리를 견디고 살게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겼다. 이런 세상에서도 여전히 크고 작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안사 역을 맡은 알마 포위스티는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하나의 미래를 향해 다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우리의 관계 속에는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씨네21>) 나는 이 말이 안사와 홀라파, 강아지 채플린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 바깥의 우리도 하나의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고, 우리의 관계 속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영화를 새해 첫 작품으로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역시 강아지와 영화에 관한 내 지론은 틀리지 않았다.
 
 
황효진
책부터 팟캐스트까지 세심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때때로 실패하며 배우는 기획자이자 작가. 건강하게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 ‘뉴그라운드’를 운영 중이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