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도 쉼이 필요하다. 체력 소모와 긴장감이 주는 피로감은 물론이고 미리 예약했음에도 틀어지는 일정이 생긴다. 예상치 못한 파업으로 기차가 멈추기라도 하면 온전히 하루를 버리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여행자의 몫이다. 어렵사리 벨기에 앤트워프에 도착했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후에 찾은 도시는 예전 기억이 지워진 것마냥 생소했다. 날씨 때문이었으리라. 한여름임에도 바람은 차고 거셌다. 흩뿌리는 비는 우산도 무색했고, 자욱한 안개는 늦가을의 전조 같았다. 호텔 어거스트(August)에 체크인했다. 플랑드르 스타일의 벽돌 건물인 이 호텔은 과거 수도원이었던 히스토리가 있다. 호텔뿐 아니라 주변 건물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벽돌 주조로 19세기 군 병원과 부속 건물들이 속한 그린 쿼터(Green Quarter) 구역이다. 이미 앤트워프에서 작지만 내실 있는 패밀리 호텔로 명성을 얻은 호텔 줄리앙(Hotel Julien)의 두 번째 호텔로 세심한 서비스 노하우와 확고한 디자인 컨셉트를 더해 어거스트를 탄생시켰다.
호텔 레너베이션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건축가 빈센트 반 듀이센(Vincent Van Duysen)이 맡았는데, 그의 첫 번째 호스피털리티(Hospitality) 프로젝트로 장장 4년이 걸렸다고 한다. 44개의 객실과 레스토랑, 바, 웰니스 스폿 그리고 작은 도서관과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어거스트의 첫인상은 의외로 럭셔리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과한 조형물이나 압도적인 페인팅, 디자인이 드라마틱한 가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잔잔한 품위와 필연적인 우아함이 느껴진다. 벽돌과 오래된 나무 계단, 난간, 군더더기 없는 창문, 세이지 그린과 조화를 이룬 화이트와 블랙 포인트 같은 색채와 재료에서 나온 느낌일 것이다. 빈센트 반 듀이센이 탁월하게 구사하는 ‘톤과 명암의 능수능란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거스트의 객실은 커다란 침대와 정겨운 발코니, 반 층 낮은 곳의 욕실이 재미있는 구조를 만든다. 굳은 날씨 탓에 온종일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룸 서비스로 시저 샐러드와 시트러스 에이드를 주문해 놓았다. 이럴 땐 여행 중 잠시 주어진 작은 공간을 나만의 세계로 세팅하는 것이 좋다.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와 침대맡의 책 두 권, 내 온기와 향수로 채워가다 보면 자극 없는 순백의 방은 금세 친숙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 옛날 수도자가 살았던 검박함이 오늘로 이어지는 듯하다. 손으로 짠 카펫과 리투아니아 리넨, 엽서만한 유화 한 점…. 섬세하지만 결코 욕심 내지 않은 호텔 방이라는 점이 이 시간을 더욱 만족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