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보이스] 30년 전, <엘르>를 읽던 엄마가 사라졌다.
엄마와 나, 어쩌면 조카까지? 비혼세 작가와 엘르의 애틋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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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 아씨들(1995)>
「
내가 어린이였을 때, 갑자기 엄마가 집에서 사라진 일이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을 들었지만, 엄마 없는 집을 한 번도 겪지 못한 내게 엄마의 부재는 ‘사라짐’으로 감각됐다. 그리고 10대가 됐을 때, 비로소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듣게 됐다. 엄마는 난소에서 발견된 혹이 암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궁 적출을 염두에 두고 수술대에 올랐다고 했다. 그해 1년 전, 엄마는 비슷한 연배의 가까운 친척을 자궁암으로 잃었고, 당시 의사의 모호한 소견은 엄마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엄마는 수술 날짜를 잡은 날부터 거의 책 한 권의 편지를 썼다고 했다. 연년생 자매인 우리가 필요한 시기마다 조언을 얻을 수 있도록. 첫 생리가 시작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이모를 찾아가라, 학교 준비물 준비가 어려우면 몇 호 누구 엄마를 찾아가라 하는 식으로. 개복 결과 다행히 엄마의 난소에 있던 혹은 암이 아니었고, 난소 한쪽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낸다. 내가 <엘르>에 기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엄마가 혼잣말처럼 “그때 <엘르> 보고 병원 갔는데”라고 말한 적 있다. 그 혼잣말을 캐물은 결과 알게 됐다. 엄마는 그해에 <엘르>를 읽고 나서 사라졌다는 것을! 30년 전, <엘르>를 읽던 엄마가 사라졌다
」엄마의 기억에 따르면 1993년 늦은 봄, 엄마는 친한 동네 엄마들과 함께 있었다. 당시 누군가 새로 나온 <엘르>라는 잡지를 가져와서 같이 읽었고, 생리에 관련된 기사 중 마침 자가진단 항목이 있었다고 한다. ‘생리량이 최근 평소보다 너무 많다’ ‘생리통이 심해 일상생활이 어렵다’ 등 자가진단 항목 중 절반 이상에 해당됐던 엄마는 몇 개 이상 해당되면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라는 안내 문구에 따라 친구들과 단체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그곳에서 추가로 초음파 검진을 받았고, 난소에 혹이 있다는 소견을 들은 것은 엄마 뿐이었다. 당시에는 자궁경부까지만 내시경이 가능했기에 난소는 절개해야 알 수 있어서 암일 수도 있다는 소견을 들은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집도한 의사는 이 정도로 혹이 작은 단계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알고 병원을 찾았냐며 운이 좋다고 했다고 한다. 여성 질환에 대한 국가 검진도 없었고 생리 정보를 나눌 플랫폼도 없었으며, 산부인과에 대한 심리적 진입 장벽이 어마어마하던 시절 <엘르>가 엄마를 구한 셈이다. 덕분에 엄마는 지금도 건강히 지내면서 딸이 <엘르>에 기고 중인 칼럼을 즐겁게 읽고 있다.

1992년 11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작된 엘르 코리아
그래서 <엘르>가 만든 자리에서 <엘르>의 ‘목소리’로서 페미니즘을, 동물권을, 다양한 몸에 대한 긍정을, 비혼 라이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 늘 여성의 곁에 있었고, 여성의 관심사에 가장 빠르게 응답했으며 동시에 여성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를 잊지 않았던 <엘르> 지면에 함께할 수 있어 새삼 영광이다. 사랑하는 조카 2호(6세, 여성)의 삶에도 <엘르>가 함께하길 기원하며, 어느덧 창간 31주년을 맞이한 <엘르>의 생일을 엄마와 함께 축하한다.

다양한 비혼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예능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출판 레이블 ‘아말페’ 대표. <걸어서 환장 속으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를 썼다.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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