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보이스]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강서구 주민 주목! 30년 넘게 강서구에서 살아온 최지은 작가의 동네 애착기.

프로필 by 최지은 2023.08.04
ⓒnote thanun

ⓒnote thanun



어느덧 익숙한 활기 속에서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사한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가을이었다. 이전까지 경기도 소도시에 살던 내게 서울은 몇 번 가보지 못한 특별한 곳이었다. 뮤지컬 영화 <애니>를 보러 갔던 서울극장 앞의 인파, 무슨 공연을 봤는지 몰라도 붉은 벽돌이 강렬했던 대학로 샘터파랑새극장, 학교 도서실보다 더 많은 책이 있어 천국 같던 종로서적…. 전주에 살던 사촌언니들은 들국화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가기도 했다. 서울엔 세상의 멋진 게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이 드라마와 동화책 속 서울 아이들은 모두 안경을 쓰고 체르니 30번을 칠 줄 아는 깍쟁이 공부벌레 같았고, 매일 밖에서 뛰어노느라 콧잔등이 시커멓게 탄 나는 그들 사이에 낄 수 없을 것 같아 겁이 났다.
 
웬걸. 서울 아이들은 내가 살던 동네 아이들보다 욕을 좀 더 잘한다는 것만 빼면 별다른 점은 없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도 교실에서 나무 난로를 땠고, 본관 옆에는 을씨년스러운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새 친구들이 생긴 나는 매일 방과 후 교문 앞에서 파는 달고나와 잉어엿, 떡볶이를 사 먹다가 1년 사이 8kg이 늘었다. 아침엔 고물상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등교했고, 하굣길엔 언덕 위 판잣집 사이에 있는 어두컴컴한 구멍가게에 들어가 100원을 내고 아폴로나 논두렁을 샀다. 6학년이 되던 해, 같은 학년 남자애들이 ‘따닥이’라 부르던 간이 전기충격기를 써서 동전 없이 오락실에 드나들다가 경찰에 붙잡혀 신문에 난 게 우리 동네의 빅 뉴스라면 빅 뉴스였다.
 
서울도 다 같은 서울로 쳐주지 않는다는 걸 중학생이 돼서야 알았다. 내가 살던 강서구와 가깝지만 엄연히 행정구역이 다른 옆 동네, 양천구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학군’이라는 것이 있었다. 목동에서 전근 온 몇몇 교사는 우리를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S 중학교 애들에 비하면 너희는 쓰레기”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다. 담배 피우는 애들이 좀 있었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못 가는 애들이 좀 많다고 그래도 되나 싶어 모두 모욕감을 느꼈지만 반박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목동에 있는 학원에 갈 때마다 서울로 처음 전학 올 때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언니는 우리 동네 이름이 싫다고 했다. 몇 년 뒤, 한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나는 XX동이 싫어”라는 대사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이 항의한  적 있었다. 나는 그 작가가 어떤 얘길 하고 싶었는지, 주민들이 왜 항의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목동도, 강남도, 대치동도 아닌 우리 동네가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청소년에게 술이나 담배를 팔지 않는 ‘양심 가게’를 찾아다녔는데, 바로 우리 집에서 두 정거장만 더 가면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작은 슈퍼마켓이 선정됐다. 강서구 OO동의 명예를 드높여준 가게 아저씨 덕분에 나와 친구들은 모처럼 우리 동네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Giselle Herrera

ⓒGiselle Herrera

 
지금 나는 그때 살던 동네 바로 옆 동네에 산다. 중학교 때 담임이 무단결석하는 친구 집에 찾아가보라고 해서 처음 와봤던 곳이다. 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방앗간과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책 대여점, 좁고 허름하지만 은근히 ‘핫플’로 알려진 막창집이 있다. 인도가 복잡한 것도 이 동네의 특징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양념게장이나 파김치를 통에 담아 팔거나 길가에 앉아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들이 있고, 어느 마트와 비교해도 싸다는 청과상 앞엔 늘 긴 줄이 늘어서는데 목청이 큰 주인과 물건을 사려던 손님 사이에 종종 실랑이가 벌어진다. 전동 휠체어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저씨들, “오래된 사진 복원해 드립니다”라고 적힌 광고판, 토스트에서 돼지 껍데기 볶음까지 별걸 다 파는 노점 사이에서 부딪치지 않으려고 요령 있게 몸을 비틀어 지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아마도 세상 어딘가엔 이보다 더 좋은 동네가 있겠지만, 나는 우리 동네의 어수선한 활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그럴 것이다.  
 
 
최지은
여성과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쓴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고 뉴스레터 ‘없는 생활’을 발행한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디지털 디자이너 장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