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보이스] 잊었던 언어를 키우는 법
나의 앎이 실천과 멀어지지 않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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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학문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다큐멘터리 <206: 사라지지 않는> 간담회에서 박선주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이 말이 왜 이토록 마음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6·25전쟁 때 국군과 미군에게 학살된 민간인 유해 발굴 현장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의 주연이기도 한 그는 고고미술사학자로서 수십 년째 시민들과 함께 학살의 기록이 남은 현장을 찾아다니는 시민유해발굴단을 이끌었다. 학문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새롭지 않은 단어들은 그의 입에서 나와 새롭게 들렸다. 그리고 객석에 앉은 채 그 말의 힘에 휩싸인 순간, 조금 서글펐다. 그 말이 가리키는 세계와 지금 내 현실의 거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거리감은 낯설었다. 내 앎과 실천이 공공선에 닿아야 한다는 것은 한때 내 생활의 당위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걸까?
예전에는 어땠더라. 사실 영화를 보러 간 건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했던 고(故) 박말해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는 감독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혹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밀양 송전탑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고 지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밀양 송전탑 투쟁은 주변 대도시에 보급할 전력을 위해 삶의 터전에 초고압 송전탑이 설치되는 것에 반대해 지역 할머니들이 투쟁에 나선 사건이다. 2010년대 초반의 나는 이 이야기에 분개했고, 할머니끼리 서로 몸을 묶어 크레인을 막고 있다면 나도 몸 하나 보태겠다며(두 번뿐이지만) 밀양에 직접 가기도 했다. 땡볕 아스팔트 도로에 늘어앉은 할머니들, 시민들, 활동가들과 함께 저항의 전선을 만든 일, 번갈아 부른 노래들…. 나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를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 떼밀리듯 앞으로 나와 웃으며 노래를 시작한 분은 거기 있던 ‘밀양 할매’들 중 막내라고 했다. 우리가 몸으로 만든 전선 앞에 마주선 경찰 저지선은 불과 2~3m 앞에서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볼 수 있었고, 그들 또한 우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역시 까마득히 잊힌 장면들이다.
마침 영화는 기억을 말하고 있었다. 국가폭력으로 죽고 파묻힌 사람들의 존재, 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겪게된 불이익 때문에 삼켜야 했던 울분들, 그렇게 공권력에 의해 침묵당한 채로 수십 년이 흐르자 집단적 기억에서 잊힌 죽음들 그리고 그것을 복원하겠다고 유해를 발굴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6·25전쟁 집단학살 피해자는 최소 30만에서 최대 100만 명이 될 거라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발굴해 보면 지역마다 규모와 성비, 연령대와 유품 종류가 다양하다. 수년에 걸쳐 공동발굴단에 함께한 조사단봉사자 김영희 씨는 어린아이들의 유해가 유독 많았던 설화산 현장에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발굴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그는 “발굴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눈에서 빛이 나고 기운이 난다”고 했다. 발굴단 시민들의 혹독한 실천은 이 땅의 슬픔을 얼마큼 씻어냈을까? 여기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Jason Leung/unsplash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실천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더 이상 멀어지고 싶지 않다. 과거 어느 때의 나는 배움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노교수의 말이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앎이 다르고, 그때는 몰랐던 것들로 내 삶을 부지런히 채워왔다 해도 무엇과 명백히 멀어져왔는지를 자각하면 방향을 고쳐 잡고 싶어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잊어온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정의와 실천이 존재한다.

서울국제도서전 '봄알람' 부스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디지털 디자인 장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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