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사는 곳은 다세대 주택 3층이다. 건물 뒤로는 깊고 넓은 화순곶자왈이, 앞에는 키 큰 삼나무를 두른 감귤밭이 있다. 그 너머로 남쪽 바다도 힐끗 보인다. 원룸 건물을 제외하고 채 열 가구가 살지 않는 조용한 동네다. 집은 1.5룸인데, 공간 구성이 꽤 살뜰하다. 부엌과 분리된 중문, 별도의 세탁실, 창문 없는 테라스가 있다. 시선을 어디에 두든 싱그럽고, 온통 자연으로 넘실대는 풍경에 푹 안기고 싶다. 잠에서 깨 상반신을 일으키면 제일 먼저 보이는 풍경이 비죽 솟은 삼나무이며, 걸어서 향하는 곳은 산방산이 놓인 테라스다. 잠으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운 풍경이다. 매일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아침을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겨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절에는 새벽 4시 30분~5시경에 일어나 차를 우려낸다. 몸에 맑은 기운이 돌면 짧게는 30분, 길면 한 시간씩 운동한다. 여름이면 화순곶자왈을 빙 둘러 러닝하고, 간절기와 겨울엔 홈 트레이닝을 한다. 아침밥은 늘 오픈 토스트다. 주로 동네에서 난 것들을 토핑한다. 제주 제1호 로컬 푸드 판매장인 하나로마트 안덕농협에서 구매한 제철 채소를 올리고, 계절 별미로 길과 오름 등에서 채집한 무화과와 산딸기 등을 더한다. 채집이란 무엇인가? 내 제주살이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계절 액티비티다. 봄에는 고사리를 따기 위해 새벽녘에 부리나케 움직이고, 여름이면 바다에서 트위스트를 추며 조개잡이를 한다. 가을 · 겨울에는 동네를 산책하며 버려진 것 같은 나무에서 무화과와 대추, 감귤 등을 조금씩 서리한다. 자연에서 에너지를 얻다 보니 자연스럽게 채식을 지향하게 됐고, 프리다이빙과 트레일 러닝, 등산 등 자연 액티비티도 즐긴다. 쉬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 놀기 바쁜데, 노을이 질 때면 얼른 귀가한다. 내 집이 가장 예쁠 시간이기 때문이다. 테라스가 서향으로 난 덕에 붉은 빛줄기가 집 안을 구석구석 훑는다. 집 한가운데 놓은 커다란 월넛 테이블, 식물 파치 오브제와 와인을 장식해 둔 3단 사방탁자 등은 감상에 운치를 더해준다. 재작년에 목공을 배우며 원하는 나무와 형태로 만든 가구다. 목공은 20대 때부터 내 숙원 사업이었다. 기숙사와 하숙집, 고시텔과 좁은 원룸 등을 두루 거칠 때도 공간 꾸미기에 열중했다. 불안정하고, 두려운 것투성이지만 나를 위한 작은 낭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30대인 지금도 오브제를 놓고, 공간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의미다. 자연을 한껏 들인 공간에 내가 만든 가구, 내가 채집한 물건 등을 하나둘 놓으니 비로소 삶이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나를 완성하는 삶의 풍경을 하나씩 그려나가는 기분이랄까. 얼마 전 이직도 했다. 플랫폼의 변화를 통해 내가 만든 콘텐츠를 다양하게 확장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정말이지 제주 직장인의 삶은 여느 도시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한 업무 강도와 잦은 야근, 커리어를 어떻게 발전시킬까에 대한 끊이지 않는 고민까지 안고 산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마음먹기에 따라 출근 이전과 퇴근 이후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펼쳐진다는 것. 출근 전 고사리를 채집하거나 퇴근 후 바닷가에서 러닝하거나 밤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1차원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자연이 복지를 제공한다. 제주살이 5년 차에 접어든 지금, 서울의 삶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다. 서울에는 내 삶의 토대가 되는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 삶에 집중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좋아하며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한 이 섬의 친구들과 더 오래 놀며, 함께, 지금처럼, 잘 살고 싶다.
정수미 콘텐츠 에디터. 나만의 안전 공간을 찾기 위해 제주살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