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인 ‘검열’이 새롭게 떠오른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과 정보를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1인 미디어의 가치를 앞세워 등장한 SNS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 우리는 진정 자유롭게 말하고 있을까? 2022년 10월 27일, 440억 달러(약 58조원)에 트위터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의 대답은 ‘노’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트위터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트위터에서 언론의 자유를 확장해 트위터가 더 나은 플랫폼이 되도록 만들 것”이라는 일론은 트위터의 새 주인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인권과 윤리 관련 부서 직원을 대거 해고했다. 이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계정 영구 정지를 주도한 법무 · 정책 책임자 비자야 가데도 포함됐다. 직원을 해고하는 방식은 비윤리적이지만 집단 소송과 광고주 이탈, 바이든 대통령과 UN의 경고 등의 반발 속에서 SNS의 검열 문제도 대두했다. 최근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SNS 회사의 사용자 콘텐츠 검열 및 차단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며 SNS 기업의 콘텐츠 검열 문제를 둘러싼 새로운 이념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다. 판결을 주도한 앤드루 올덤 판사는 “SNS를 통해 가짜 뉴스와 극단주의 콘텐츠가 확산되는 문제가 있지만, 기업이 이를 자의적으로 막는 것은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설명했다. 모든 SNS는 원활한 소통과 건전한 커뮤니티 형성 등을 이유로 자기만의 운영 방침을 내세운다. 하지만 메타(Meta)가 유해하거나 차별적인 게시물을 삭제하고, 육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 웰빙, 무결성 보호를 위한 작업을 수행하는 근거는 과연 얼마나 객관적일까? 이 외에도 논란 끝에 ‘온라인 안전법’에서 유해 콘텐츠 의무 삭제 조항을 폐기한 영국과 게임계 검열 집단 민원 사태로 뜨거운 한국 등 표현의 자유와 콘텐츠 보호의 팽팽한 갈등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SNS 자체가 검열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최근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번지고 있는 백지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중국 당국에서 틱톡과 텐센트에 검열 강화 지침을 내린 것처럼 베트남, 이란 등 정치 문제가 끊이지 않는 곳에서는 SNS가 반체제 인사를 색출하고 체포하는 검열 수단으로 악용되곤 한다. 군중의 검열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많다. 네이밍과 셰이밍으로 누구나 폭로 대상이 돼 사회적으로 징벌당할 수 있고, ‘캔슬’당하는 사회. 그 힘은 때론 너무 강력해서 개인이 스스로 검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캔슬 문화를 다룬 신작 〈경청〉을 펴낸 김혜진 작가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어떤 일은 빨리 판단하지 않아야 해요. 좀 더 기다리고, 좀 더 들어봐야 하는 것들이 있죠.” 듣기 싫다고 배제하는 순간, 우리는 검열의 주체가 된다.
류가영 지구는 진짜 멸망할까? 미디어의 이목을 끌기 위해 미술 작품을 테러하는 극단적 방법을 택한 환경 단체들, 환경 파괴를 ‘에코학살(Ecocide)’로 명명하고 처벌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움직임, 인류가 손쓸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회의적인 ‘운명론(Doomerism)’에 빠진 이들까지. 기후우울증은 이제 시대 정서가 돼 우리를 죄책감과 무력감, 공포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자기연민과 막연한 공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 세대를 ‘소수자’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장기적 가치를 최우선하는 ‘장기주의(Longtermism)’, 즉 효율적 이타주의가 떠오르는 이유다. 이미 미래 세대를 걱정하고 있다고? 옥스퍼드대 교수 윌리엄 맥어스킬은 지금 인류가 겪는 현상과 고민을 사춘기에 비유한다. 지금의 그릇된 행동이 평생을 좌우함을 깨닫고, 수많은 경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책임감을 어렴풋이 인지한 단계를 의미하는 것. 아직 구체적인 행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피엔스의 멸망〉을 펴낸 철학과 교수 토비 오드가 “생화학 무기 확산을 막기 위해 설립된 생물무기금지협약(BWC)의 연간 예산이 맥도날드 점포 한 개의 연간 예산보다 적다”고 꼬집을 정도니까. 여전히 북극곰과 빙하처럼 일상과 접점이 없는 이미지만 이슈화되고, 미디어는 환경 문제가 그린피스나 고위 공직자들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인식을 심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환경주의자이자 예일대 삼림 · 환경학부 학장을 지낸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는 일찌감치 ‘환경운동은 문화운동이자 정신혁명’임을 주장한다. “환경 문제에서 중요한 주제는 생물 다양성 감소, 생태계 붕괴, 기후 변화이고 이를 과학이 해결하리라 믿었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정말 중요한 주제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 무관심이었다”는 그의 말은 2023년,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구매할 친환경 제품을 찾기보다 소비 자체에 적극 저항하는 태도, 완벽한 재활용 시스템의 구축보단 평생 쓸 견고한 제품을 생산하고, 전기차나 유기농 농산물 등 고소득층을 겨냥하기보다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비관은 버리고 일상을 지키며 사춘기를 잘 넘겨낸다면 우리는 꽤 멋진 성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혜진 월드컵 16강 진출을 결정 지은 한국 대 포르투갈 경기에서 두 번째 골이 터지던 순간,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다. 어떻게 그토록 선수들의 눈물과 웃음에 이입할 수 있었을까? 엄밀히 말하면 승리의 기록도, 상금도, 명예도 선수들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2022년 11월 〈뉴욕 타임스〉 홈페이지에 공개된 한 기사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영미권에서 잘 알려진 독일어 단어로 타인의 불행에 은근히 안도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대척점에 놓인 ‘프로이덴프로이데(Freudenfreude)’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독일인인데 저런 단어는 처음 들어본다’ ‘문법적으로 잘못된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기쁜 일을 내 일처럼 기꺼이 지지하고 축하하는 감정을 뜻하는 이 개념에 모두 따뜻한 시선과 공감을 보냈다. 이 기사를 쓴 심리학자이자 프리랜스 저널리스트인 줄리 프라가는 2021년 하버드대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 일상에서 긍정적인 공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돕는 것과 같은 친절한 행동을 더 자주 실천하게 될 뿐 아니라 삶의 회복력을 키우고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반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개인의 자존감을 낮출 뿐이다. 우울함을 겪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이덴프로이데를 2주간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한 결과, 이들의 대인관계와 정서가 나아졌다는 2018년의 또 다른 연구 결과도 있다. 미디어가 비추는 세계는 ‘빌런’투성이지만, 실제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여전히 보편적인 공감과 지지다. 밸류랩 소비자행동예측연구소 두주연 대표는 성장과 재력, 성공 등 가시적 가치들이 주를 이뤘던 관심 키워드가 팬데믹 이후 개인과 자유, 배려, 격려, 치유, 안정 등으로 변화했음을 강조한다. 중앙대학교 경영학부 황금주 교수 또한 ‘스크루지 효과’를 언급하며 죽음이 가시화됐을 때 오히려 이타적 면모를 드러내는 인류의 속성을 지지한다. 물질만능주의와 자발적 무소유, 인간중심주의와 환경중심주의가 동시에 존재하듯 상충하는 가치들은 우리 문화적 세계관에서 함께할 것이다. 2023년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기쁨을 축하하고 나아가 슬픔에도 공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썩 괜찮은 동료 시민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 프로이덴프로이데와 비슷한 단어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자애’다. 더불어 기뻐할 줄 알고, 연민하며 베푸는 마음이 행동과 언어에 스며들 때 우리 내면은 평화로울 수 있다.
이마루 알고리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시나리오는 수년 전부터 제기돼 왔다. 내가 ‘좋아요’ 한 것으로만 둘러싸인 세계에서 성찰을 얻고, 타인이 이미 한 번 매만진 추천 리스트 속에서 진짜 내 취향을 발견할 수 있을까? 모두가 엇비슷한 알고리즘에 갇힌 사회에서 어떻게 창의적 사고가 가능할까? 어쩌다 한번 ‘검색’한 키워드 때문에 흥미 없던 내용에 자꾸 노출될 때, 데이터가 기억하는 나는 과연 어떤 취향을 가진 어떤 존재일까? 2021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알고리즘의 편견〉은 AI 개발사업에 한창인 빅 테크 기업의 빅 데이터가 인간의 무의식적 편견을 심은 알고리즘을 통해 축적된 것임을 지적한다. 결국 모든 자동화 시스템이 편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큐멘터리는 우려한다. 이에 비해 스웨덴의 응용수학과 교수 데이비드 섬프터가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을 통해 전하는 말은 한층 희망적이다. 알고리즘을 향한 일부의 공포가 과도하다는 것이 그의 요지. “자율학습 알고리즘은 우리의 생각을 답습할 뿐이며 선입견을 갖도록 프로그래밍되지는 않는다”고 명시하며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알고리즘의 예측이 정확한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통계적으로 증명한다. “알고리즘이 필터 버블(인터넷 정보 제공자가 개인 맞춤 정보를 제공함에 따라 이용자가 선별된 정보만 제공받는 현상)과 가짜 뉴스를 형성해 편견의 문제를 부각시켰고, 우리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관건은 이미 개발된 알고리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다. 소수의 필요와 편익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더 넓은 사회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 섬프터의 주장이다. 이미 넷플릭스 매출의 75%는 추천 시스템을 통해 발생하고 있다. 후발주자였던 스포티파이가 경쟁사를 앞지르고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가 된 데는 맞춤 추천 기능의 공이 컸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인스타그램 광고에 ‘영업당했다’는 말이 쉽게 공감을 사는 지금, 본래 갖고 있던 편향성에 의존하는 우리가 알고리즘을 비난하는 건 섬프터의 표현대로 ‘헛발질’일지도 모른다. 마침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주목한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인 ‘디깅모멘텀’은 하나의 대안처럼 보인다. 저자인 김난도 교수는 디깅의 핵심은 ‘행동력’이라며 “진정한 디깅러는 기업이 생산하는 문화나 생태계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전략의 방향을 주도하는 힘을 갖는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점점 더 강력해지는 알고리즘의 편의에 갇힐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소통하면서 자기성장을 이끌어낼 것인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류가영